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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루 MuRu May 21. 2016

정체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내 정체성은 내가 아니다

(이 글은 이전에 썼던 "정체성은 내용이 아닌 느낌이다"의 후속글이다.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링크를 클릭해서 먼저 읽어도 좋다. 같은 주제인 '정체성' 관련 내용이지만  글의 차이는 크다. 그래서 앞서의 글은 '자기 미움' 매거진에 넣었지만 이 글은 '메타 사유' 매거진에 넣었다. 의도적 배치이다. 그러므로 구분해서 읽으면 좋다. 일반적인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서는 앞서 글의 관점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글은 필요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글이다.)




'내용'만이 아니라 '느낌'마저도 넘어선 정체성

앞서의 글에서는 '내용'으로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의 모순과 한계들을 짚어봤었다. 그리고 정체성의 본래 근거로 '느낌'을 제시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자신의 혹은 타인의 정체성을 결정할 때 사용되는 모든 것이다. 그의 인종, 국적, 성별, 외모, 나이, 이름, 직업, 능력, 성취하거나 하지 못한 것, 성격, 특성 등이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그 어떤 '내용'도 정체성의 근거나 바탕이 되지 못하며 우리는 그에 의존할 필요가 없음을 말했다.


그러면서 정체성이란 결국 그 모든 내용들을 바탕으로 가지고자 하는 어떤 느낌의 문제라고 했다. 그 느낌은 '비조건적, 비한정성의 존재감'이었다.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나 능력에 바탕하고 의존해서 가지려고 하지만 사실은 그에 의존할 필요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당당함과 떳떳함, 자랑스러움, 만족의 느낌'이다. 우리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성취해서, 돈을 벌어서, 지식을 갖추어서, 관계를 맺어서, 혼자만의 생각으로 궁극적으로 가지려고 하는 게 바로 그 '있는 그대로에서의 온전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어떤 '불완전한 느낌, 안 좋은 느낌, 부족한 느낌'을 가지기 위해 뭔가를 하는 이들은 없다. 그렇게 부정적 느낌으로 자신을 구축하는 '내용'을 쌓으려는 이는 없다.


정체성에 대한 바탕으로 '느낌'을 제시한 이유는, 애초에 정체성의 기반이 될 수 없는 '내용'에 의존하고 의지하는 것이 '아닌 것을 그런 것으로 삼는' 근본적, 태생적 한계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내용으로 정체성을 삼는 건 결국엔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로워하고, 허무해하고, 힘들어하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것이든 안 좋은 것이든 내용에 의존하면 할수록 우리의 정체성은 더 혼란스럽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지낼 수는 있겠지만 그 안정 조차도 한계가 있는 안정이다.


마치 바다에서 표류하면서 갈증에 어쩔 수 없이 바닷물을 마시지만 염류 농도가 체액보다 훨씬 높기에 오히려 마신 바닷물보다 더 많은 물을 배출해서 탈수증으로 죽게 되는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사실은 우리 자신이 물이다!)


'차별 문제'만 해도 그렇다. 역사적 과거일수록 인류는 사람의 '내용'으로 상대 집단을, 상대를 그리고 나를 절대적으로 차별해 왔다.


시대적으로 보자. 아주 먼 과거에는 인종이라는 내용에 의한 구분이 절대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타 인종은 말살시켜도 아무렇지도 않은 때도 있었다. 흑인이라고, 인디언이라고 무조건 노예로 만들거나 착취를위해 학살했다. 그러다 그 부분은 점점 약해져 왔다. 물론 인류는 아직도 여전히 인종 차별적인 습성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먼 과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론 분명 나아졌고 앞으로 점점 나아질 것이다. 신분 차이에 의한 무조건적 차별도 마찬가지다.


조금 가까이는 남녀라는 내용의 차이가 절대적인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거의 모든 사회에는 남녀차별의 요소가 존재한다. 어떤 국가나 사회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곳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성은 점점 더 남녀차별을 없애가는 것, 넘어서는 쪽으로 가고 있다. 남녀차별의 상황을 현재보다 더욱 개선시키기 위한 의도적이고 의지적인 노력과 투쟁은 아직도 필요하지만 여하튼 그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


현재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의 타파도 그런 흐름이다. 주로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앞으로 점점 더 중동이나 동양으로도 번져갈 것이다.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내용'에 기반한 차별을 없애 나가는 것, 넘어서 가는 것이 말이다.


이렇듯 인류는 큰 흐름에서는 내용에 대한 의존, 내용에 의한 차별을 없애고 넘어서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어쩌면 '가장 마지막에 남을 내용에 의존한 차별'은 바로 '내용에 의존한 개인의 정체성의 차별'이 될 것이다. 자기와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래서 앞서 쓴 글과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마지막 차별, 기저의 차별을 좀 더 빨리 눈치채고 넘어서자는 게 되기도 하겠다. 마치 먼 과거에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이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가 지금 주요 주제가 되었듯이, '내용에 의존한 개인의 정체성 차별' 문제도 미래에는 점점 주요 주제로 떠오를 것이라 예측된다.


물론 내용에 바탕한 정체성 설정을 완전히 부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내용을 최대한 잘 활용하는 게 더 지혜로는 것이다. 그것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도구는 잘 써 주는 게 미덕이다. 빤히 쓸 수 있는 도구를 안 쓰는 것은 다만 어리석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내용이든 자신을 잘 보완해 주고, 유용하게 하고, 도움을 준다면 기꺼이 쌓고 쓰자.


다만, '정체성은 그 사람이 가진 내용에 의해 절대적으로 정해진다'는 이 오류를 자각하면 된다. 자신이 그리고 타인이 가진 내용으로 그 정체성을 결정해서 그것을 절대화 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래서 내용이 부족하다고 정체성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고, 또 내용이 크거나 많거나 좋다고 정체성도 그렇다고 절대시 하지 않으면 된다. 즉 내용에 따라 불필요하게 괴롭게 되지 않으면 됩니다.


사실 인간이 가진 문제와 고통 거의 모두가 바로 이 '정체성은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설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위에 링크한 앞서의 글에서, 이러한 한계와 모순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했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인 '본래의 느낌'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했다. 어떻게 하면 그것을 다시 느낄 것인가에 대해서도.




그런데, 이제 좀 더 근본적인 사유로 들어가야 한다.


사실은 '느낌'마저도 하나의 방편이었지 정체성에 대한 궁극적인 답은 아니다.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이 글에서 '느낌'마저도 넘어서거나 무시하거나 하자는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란 것이다. '내용'에 대해서도 이미 그렇게 말했다. 정체성을 내용으로 한정 짓는 것을 하지 말자고 할 때, 그것이 결코 내용을 무시하거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내용의 주인으로서 철저히 잘 활용하자고 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느낌도 그렇다. 우리가 내용을 근거로 구축하고자 했던 '있는 그대로의 나의 온전성, 충분함, 만족함, 좋음, 괜찮음'의 느낌은 사실 그러한 내용의 바탕 혹은 그에의 도움, 의존, 의지가 없어도 '본래 그러함'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일단 우리의 문명과 문화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와 문명은 다른 발로 하면 '집단적 학습'이다. 아기가 자라면서 부모와 어른과 사회로부터 주입되는 현 문명, 문화들의 모든 설정은 '너의 정체성은 네가 가진 내용이다'가 된다.


그러나 자연에서 인간 이외에 그런 인위적 설정을 정체성의 근거로 만들고 받아들이는 존재는 없다. 인간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인간 특유의 언어 기능, 개념 설정 기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혹은 동물들 중에서도 어느 정도 지력을 가진 경우엔 비슷한 감을 가지는 경우도 있을 순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일종의 오염 혹은 착오인 셈이다. 자연 속의 그 어느 것도 그렇지 않다.  


다소 유적 표현이지만, 심지어 지구 밖으로 나가 행성과 별과 은하들도 그 내용으로 정체성을 한정하고 제한하진 않는다 볼 수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그럴 뿐이다. 오직 인간만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일단은 '있는 그대로의 온전함'에 대한 느낌을 건강한 정체성의 근거와 바탕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훌륭하다. 의미가 있고 유용하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런데 왜 여기서 그 '느낌'마저도 품되 마침내 넘어서야 한다고 말을 하는 걸까?




그것은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이다. '내용'보다는 굳건하지만 '느낌'을 정체성의 바탕으로 삼는 것도 사실은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용만이 아니라 느낌에 대한 의존도 끝끝내는 의존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어쩌면 쉽게 느끼거나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직 내용으로 정하는 정체성 부분도 넘어서기 힘든데 그 바탕인 느낌마저 넘어서라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시해 보는 이유는, 그것이 쉽든 어렵든 '그런 것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현 문명이, 각 문화가 다른 것을 제시해 왔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이고 '한계는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든 어렵든, 혹은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그와 상관없이 일단은 "본래의 것'이 제시되어야 한다. 보여야 한다. 이야기되어야 한다. '다른 게 있다'는 것이 말이다. 이 글은 그런 의미로 쓰인 것이라 보면 된다.




왜 '느낌'마저도 정체성의 최종 바탕이 될 수 없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정밀하게 말하면 느낌도 사실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만 비언어적 내용이고, 언어 이전의 내용이고, 미세한 내용인 것이 다를 뿐이다. 어쩌면 최초의 내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내용'이 왜 정체성의 온전한 근거가 될 수 없는지는 앞서의 글들에서 충분하게 이야기했다.


정체성의 바탕으로 삼을 그 '온전한 느낌'은, 충분히 의의가 있으며 선명하게 가질수록 좋다. 그러나 그렇게 가지면서도, 궁극적으론 그 느낌마저도 조건이고 앎이고 분별이고 내용임을 알아채야 한다. 주의할 것은, 그렇기 때문에 느낌을 무시하거나 없애야 한다가 아니라, 그것을 잘 사용하되 그 근본 정체와 한계를 알면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더 자유로워진다.


성숙한 사회로 갈수록 아이들에게 정체성과 관련된 학습이나 교육, 문화의 전달에서 '내용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도 몇 가지 '차별'의 해체 과정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인류의 역사 자체가 그래 왔다. 계속 '내용 의존도'를 낮추어 오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일종의 집단의식적인 성숙인 셈이다.


성숙한 사회일수록 인간의 내용에 의한 정체성 결정과 차별을 없애는 쪽으로 교육을 하고 있고 문화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분명 바람직한 것이며 더욱 장려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회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계속 그 구성원들이 노력하고 때론 투쟁도 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이든 개인이든, 만약 끝끝내 '느낌' 마저도 나의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 근거로 남겨두게 되면, 그러면 언젠가는 다시 '내용'으로 빠져들게 되는 흐름이 생길 수 있다. 이미 느낌 자체도 내용인 측면도 있지만, 그 전에 넘어섰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의존'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았으므로 바람에 의해 다시 열릴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여지가 남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전체 사회와 문화가 건강하게 되어 있으면 웬만하면 다시 내용 위주로 절대적으로 빠져드는 일은 잘 생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투쟁,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집단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시 내용으로 가려는 이들이 사회적으로 저지되고 치유될 것이다. 혹은 비판을 받을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 인종 차별이나 남녀 차별, 소수자 차별 등에 대처가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일종의 사회적 항상성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건강성, 항상성의 바탕 위에서 이제 '느낌에 의존하는 정체성' 문제도 점점 해결해 가야 한다. 짧으면 수 십 년일 수도 있지만, 아마 수 백 년, 수 천년이 걸릴 수도 있다. 마치 고대부터 시간을 거쳐 전근대 사회로, 다시 근대 사회와 후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그 거대 과정에 긴 시간이 걸려왔듯이 말이다. 시간 상의 문제일 뿐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나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아니,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으로 정체성 삼음'이 아니라고 했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그대로의, 그 자체로서의 온전함'의 느낌을 정체성으로 삼으라고 해서 그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다시 그 느낌마저도 아니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내용도 느낌도 다 무시하라고? 다 허무한 것이고 소용없다는 말인가? 그런 정체성 자체가 어떻게 되는 거야?"는 식으로 말이다.


사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계속 강조해 왔었다. 그건 오해다 무시하거나 허무하다 여기는 것이 말이다.


내용이든 느낌이든 모두 '도구'이다. 그러므로 본인이 원하는 내용, 느낌이 있으면 최대한 그것을 잘 사용해서 좋은 정체성, 건강한 정체성의 요소로 삼으면 된다. 하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내용이든 느낌이든 그것을 '정체성 그 자체 혹은 절대적 정체성'으로 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결국 고통과 혼돈,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 차원에서든 집단 차원에서든 말이다.


이렇게까지 오면 아마 이 부분을 눈치챌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체성'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도대체 정체성이란 게 무엇인가? 내용으로도 느낌으로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럼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아니, 그게 결정될 수 있는 무엇인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맞다. 사실은 그렇다. 내용이든 느낌이든 정체성 자체는 아니며 다만 정체성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사용할 뿐이라고 했지만, 결국엔 마지막으로 남게 되는 문제는, '그렇다면 정체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이다.




정체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사실은 이 '정체성' 마저도 내용이다. 말하자면 정말 '마지막' 내용인 셈이다. '느낌'도 거의 마지막 내용일 수 있지만 마지막이라기보다는 '미세한' 내용이라는 게 더 맞다. 진짜 마지막 내용은 바로 '정체성 자체'인 것이다. 가장 순수한 내용 혹은 맨내용(맨살과 같은 의미로).


그리고,

내 정체성은 내가 아니다.


정체성. 나의 정체, 나라는 존재의 정체. 혹은 나 아니더라도 뭔가 존재하고 있는 그 대상의 정체.


이것은 엄중히 말하면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설정이다. 내용이다.

철학적으로는 '주체 설정' 혹은 '주체-객체 설정'이라 할 수도 있다.


이 최초의 내용이 있었기에 이제 이것을 바탕으로 느낌과 그리고 수많은 생각과 행동과 구체적 성취와 물질적인 내용들이 다 드러붙은 것이다. 이 구조는 선명하다.


선명하지만 일상과 삶에서 얼마나 이것을 자각하며, 실제 삶에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적용되느냐는 결국 각 개체 의식의 '선택'의 문제가 된다. 구조가 아무리 선명해도 이 자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에서 아무런 의의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개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집단에도 마찬가지다. 인류 전체에도. 반대로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이고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되다면 사실은 삶에서, 존재에서 가장 큰 주제가 될 수 있다.




이 글은 여기에서 멈출 것이다. 얼마든지 더 풀어서, 덧붙여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실제 할 말은 이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더 할 말은 없다. 다만 추가적인 자극과 흔들기를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필요한 말을 더 할 수는 있겠지만 핵심은 다 나왔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만약 관심이 생긴다면 혹은 의식의 초점이 여기에 맞추어진다면 하나의 삶의 주제로 이것을 탐구해 가는 것이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순수한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설사 그게 아니어도, 이제까지 잘 살아온 삶을 계속 그리고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면 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체성 그 자체와 상관없이

온전히, 여여히, 무한정, 비한정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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