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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Dec 10. 2021

기차를 기다리며

# 사람과 사람이 타고 있는

# 1


새마을호는 아주 빨리 온다.
무궁화호도 빨리 온다.
통일호는 늦게 온다.
비둘기호는 더 늦게 온다.
새마을호 무궁화호는 호화 도시 역만 선다.
통일호 비둘기호는 없는 사람만 탄다.
새마을호는 작은 도시 역을 비웃으며,
통일호를 앞질러 달린다.
무궁화호는 시골역을 비웃으며,
비둘기호를 앞질러 달린다.
통일쯤이야 연착을 하든지 말든지,
평화쯤이야 오든지 말든지.

(백무산, '기차를 기다리며')


곰팡이 슨 대학노트에서, 검정 모나미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이 시를 발견했습니다. 젊은 시절 공감하고 좋아했던 시였나 봅니다. 소리 내어 읽어 보다가, 아무래도 이 시대와 맞지 않는 것 같아, 현실을 반영하여 몇 줄 더 적어 봅니다.



지금은 KTX, SRT가 더 아주 빨리 온다.

통일호, 비둘기호는 다 없어져 버리고, 더 이상 이름으로도 오지 않는다.

무궁화호는 가끔씩 아무도 가꾸지 않는 무궁화동산을 지나쳐 오지만,

통일이야 평화야 떠들든지 말든지,

없는 사람이야 오든지 말든지.



이렇게 적고 나니, 무슨 까닭인지 눈물이 치밀어 오릅니다.





# 2


"어디까지 가세요?"

차창 밖에는 우리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뒷걸음치는 세상이 있었다. 따분함과 무료함을 견디다 못해 나는 말 한마디 없이 창밖의 세상에 눈길을 두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쪽은 그걸 아세요?"
"네? 그럼 이 열차는 무엇하러 타셨어요?"
"그야, 이 열차가 어디까지 가는지 그걸 알고 싶어서죠."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고, 기차는 좀처럼 속력을 늦출 것 같지 않았다.... 


옛날에는 이렇게 묻는 걸로 시작하는 소설도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기차에서 이렇게 수작 걸듯이 물었다. 인연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었고.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지금은 
묻는 것이 결례가 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묻기 전에 검색해서 깨쳐야 하는 세상이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금지된 시대인 것이다. 


하긴, 기차가 너무 빠르다. 물음에 답하기 전에 도착할 정도로. 이 시대에서는 무료하고 따분할 틈이 없다. 그리고 궁금할 틈도 없다. 스마트폰 속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알아야 할 것들이 넘친다. 옆자리 낯선 이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냥 혼자 타면 더 편안했을 텐데, 생각하니 불편하고 못마땅한 대상일 뿐이다. 오프라인 관계는 이미 온라인 관계에 떠밀려 설 곳을 잃어버렸다.


'라떼' 소리한다고 혼나겠지만. 구시대에는 홍익회(弘益會) 명찰을 달고 승무원이 아닌 사람이 기차 안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처음에는 대바구니에 삶은 달걀과 까먹기 좋은 귤 따위를 넣고 다니며 팔았다고 하는데, 나도 그 광경은 목격하지 못했다. 카트에 오징어, 땅콩, 삶은 달걀, 호두과자, 카스텔라, 캔맥주, 바나나맛 우유 등을 남자 사람이 팔고 다닌 것은 안다. 아, 그러다 여자 사람이 작은 카트에 대형 보온병을 싣고 다니며 커피를 판매하기도 했다. 믹스커피였는지, 원두커피였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히 종이컵에 커피를 따라주고 돈을 받았다. 그랬었다.


더 이상 오지 않을 구시대의 유물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끼리 사는 풍경이다. 아 사람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도 되는, 사람이 사람에게 묻고 대답해 주는, 함께 어우러져 종착역까지 그리 빠르지 않게 여행하는 그런 기차는 오지 않는 걸까. 그렇게 사람과 사람이 타고 있는 기차를 기다려 본다.





8년 전 송탄역, 기차를 기다리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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