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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Mar 03. 2023

튤립이 살았어요

# 식물이 사람을 키운다.


인생에는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시간도 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고 또한 완벽한 순간도 있다. 그 순간은 그냥 주어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내가 만들어낼 수 있다. (김은주, '나라는 식물을 키워보기로 했다' 중)



작은 텃밭이 생긴 후로 아내는 밝아졌다.


"저것 좀 봐요, 튤립이 모두 살았어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나는 여기만 오면 살 것 같아요. 얘네들 보고만 있는데도 시간이 너무 빨리 가 아쉬워요."

"그냥 여기 계속 있고 싶어요. 집은 답답해서 돌아가기 싫어요." 


텃밭에만 오면 생기 도는 얼굴로 깔깔대며 재미있어한다. 이른 봄, 튤립 구근 20개를 구해와 텃밭상자에 심더니 20개 모두 싹을 틔워 냈다. 채소 키우라고, 튼튼한 스프러스 구조목으로 큰 텃밭상자 2개를 만들어 주었더니, 채소보다 꽃을 먼저 심었다. 그리고는 소녀처럼 저리 좋아한다. 끙끙대며 개비온(gabion)에 돌을 채워 반듯한 돌담을 완성하더니, 마당에서 밭으로 내려가는 돌계단도 그럴싸하게 만들어 낸다. 자기는 전생에 석공이었을 것이라 털어놓는 아내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식물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면, 식물을 좋아하게 된다고 했다. 사람이 식물에게 쏟은 관심과 애정만큼 식물은 사람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눈치 보며 사람을 떠보려 하지 않는다. 그냥 관심을 가져 주면 좋아하며 꼬리를 흔든다. 물과 거름은 관계의 수단일 뿐이고, 사실은 관심이 식물의 성장을 결정짓는다. 사무실에서 집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시드는 축하 화분도 알고 보면, 나의 무관심 탓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빛나는 화분도, 내가 그의 존재를 잊어버리면 시들다 말라 버린다. 사람이 식물을 속이고 배신한 것이다.



식물을 가꾸는 아내를 보며 생각한다. 


어쩌면, 사람은 식물로 태어나서 동물로 살다가 식물이 되어 죽는 건지 모른다. 우리가 식물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이 우리를 키워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식물에게 움직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수많은 움직이는 것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그 깊은 뿌리내림을 배워야 한다. 사람이 두 발로 걷는 이유는 자기의 자리, 서 있을 곳을 찾아가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는 내 설 곳을 찾았는지 묻는다. 식물처럼 뿌리내리고 성장하며 살고 있는지, 아직도 자리를 찾아 바쁘게 떠도는 중인지, 아니면 내 자리가 아닌 곳에 뿌리를 잘못 내리고 있지 않은지, 내게 묻는다.





우리를 잘 가꿔 주려고, 튤립이 땅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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