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의 회복으로 회복할 수는 없어도
단순히 회복을 빌기보다는 "이미 회복되어 건강하다."는 가정 아래 생활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마음속 깊은 꿈을 일상의 현실로 만드는 비결이 있다.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고, 꿈은 이미 현실이 되었으며, 기도는 이미 답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렉 브레이든, '디바인 매트릭스' 중)
튤립이 피었다.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는 게 맞다.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으면 '뇌사'이고 가능성이 있으면 '식물인간'이라던데, 그동안 뇌사는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단지 봄을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스스로 동면에 들어 까맣게 봄을 잊고 겨울만을 계속 생각했던 게 아닐까.
손가락을 까닥이다 깨어나는 영화 속 병사처럼 동면에서 깨어나는 꽃을 본다. 회복하자 다짐하는 것보다 회복한 체 움직이는 것이 효과적이라 그랬다. 회복으로부터 회복하는 것이다. 움직임은 이동이다. 안에서 밖으로, 아래에서 위로, 어제에서 오늘로, 겨울에서 봄으로. 공간과 시간의 이동을 통해 사람이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야 겨우,
꽃으로 회복한 튤립이 보인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이고, 차창에 기대앉은 안도현의 시집이 읽힌다. E4000 커널형 이어폰을 꽂고 있는데도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이미 회복되어 건강하다.'는 가정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랬다. 회복의 유일한 길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오래 걸으면 다리가 지치는 것처럼, 오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마음도 지치게 된다. 그래, 반세기 넘은 길을 걸어왔으니 지칠만 하다. 그래서 고맙다. 참고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참 애썼다. 이 정도에서 끝내고 회복해 준 육신이 고맙고, 가장 힘든 시절이 지나갔다는 사실이 고맙다. 우리 하나하나가 화려한 꽃을 피우든 피우지 않든 상관없다. 힘든 겨울을 뚫고 심중의 밭에 싹을 틔워냈으면 된 것이다. 거기까지만 해도 참 애썼다. 수고했다.
딸 그림 - 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