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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씀 Jun 16. 2023

천국을 장식하는 꽃

# 꽃에 대한 소소한 단상들


"여기에서 꺾고 싶은 꽃을 하나 꺾어 보거라." 

시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가장 아름답게 핀 장미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자 시아버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정원의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이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꺾어 천국을 장식한다. 얘야, 이제는 너무 슬퍼하지 마라."

(정호승,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중)



몇 해 전,


출장 중에 투병 중이던 장인어른의 귀천 소식을 듣고, 전화 속에서 우는 아내에게 했던 말. 정원에 핀 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꺾어 꽃병에 꽂듯, 하느님도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먼저 불러 천국을 채우는 거라며 위로했었지요. 그때와 달리 지금 조수석의 아내가 명랑합니다. 다행입니다. 부디 우리 앞에 남아 있는 여행길 내내 유쾌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가슴속에서


피었다 졌다, 웃었다 울었다, 도무지 종잡기 힘든 꽃이 있습니다. 계절이 바뀐 줄은 귀신같이 알아, 어느새 활짝 피어 웃고 있는 꽃. 쇠약해진 내 마음에 언제까지 꽃으로 살 수 있을까요? 나무가 살아야 꽃도 사는 법. 나무는 다른 꽃을 피우지 않고, 꽃은 나무를 떠나 피지 않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속에서 같이 늙고 있는 꽃과 나무, 바로 부부입니다.



'복숭아꽃'을


컴퓨터 바탕화면이나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지정해 놓으면, 이성친구가 생긴다는 '복숭아꽃 스킬'을 처음 알았습니다. 하긴 복숭아꽃이 야하긴 합니다. 진한 분홍의 개복숭아꽃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설렙니다. 복숭아꽃이 하도 이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잊고 복숭아밭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두드러기야 뭐 어찌 되겠지요. 그보다 애타게 사랑을 찾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복숭아꽃 스킬'용 사진을 찍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요.



사실,


꽃 중에서 초여름에 피는 아카시아꽃을 제일 좋아합니다. 수북이 나무에 달려 있는 팝콘 모양의 꽃을, 정말로 팝콘처럼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회복지 정책에 있어서 클라이언트는 목적이면서 훌륭한 자원입니다.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서비스 제공의 주체이기도 하지요. 배고픔을 추억하는 꽃, 아카시아를 보며 클라이언트를 떠올렸습니다.



얼마 전


벚꽃 축제가 열리는 동학사를 찾았다가 꽃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에 기겁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꽃에 열광하는 걸까요? 농사짓는 사람은 매화라 부르지 않고 매실꽃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꽃만 보지 않고 내일의 열매를 같이 보는 까닭이지요. 아마 저들도 벚나무의 꽃이 아니라 버찌의 꽃을 보려고 운집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꽃은 나무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성장의 가치는 한 걸음씩 내딛는 걸음 자체에 있음을 알고 있는 듯했습니다. 음. 사실 나는 벚꽃처럼, 누군가를 추억케 하는 화장기 있는 꽃보다,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꽃이 좋습니다. 꼬깃꼬깃 숨겨둔 미량의 꿀로 하굣길 허기를 달래주던 누나 같은 꽃, 사루비아처럼.



세종 영평사에


살구꽃이 피었습니다. 양지바른 길가 관심을 받은 나무에만 꽃이 피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봄꽃처럼 관심을 많이 받을수록 먼저 피는 것이지요. 꽃에 대한 관심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입니다. 관계가 시들지 않도록 왕래하고 마음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도 똑같습니다.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서로를 느끼는 것이지요. 그래서 꽃이 핀 아름다운 화단을 망치려면, 불을 지르거나 파헤치는 수고를 하는 것보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합니다. 무관심은 잡초를 키워 화단을 못쓰게 만들어 버리니까요. 우리 집 화단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힘들지 않고


어찌 힘이 생기며, 겨울 없이 어찌 뜨거움이 달아오르며, 캄캄한 시간들 없이 무엇으로 정신의 키가 커 나올 수 있겠는가. 박노해 시인의 '사람은 무엇으로 크는가'를 읽다가 울컥했습니다. 힘이 들어야 힘이 생긴다는 말... 마음에 새깁니다. 정말 힘이 나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봄꽃들도 힘든 겨울을 동력 삼아 껍질을 뚫고 꽃을 피우는 겁니다. 봄비 속에 찾은 범어사에서 꽃들은 그렇게 피나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람도 나무도 춥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야 나이에 테를 두르는 법이지요. 단절된 행복, 멈추어버린 사랑, 줄어든 보폭, 이런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면... 기꺼이 힘들어했으면 좋겠습니다. 힘이 들수록 더 많은 힘을 낼 수 있으니까요. 'Life'란 단어에 'if'가 있는 까닭은, 우리의 인생에는 항상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 지나자 어느새 봄꽃 피는 것도, 추위 속에 'if'가 숨어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사는 일이 힘들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if'가 들어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도 봄꽃처럼 활짝 필 가능성 100%니까요.





나는 내가 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꽃에 대하여 쓰다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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