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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침

by 그방에 사는 여자

아침 6시, 끝 간 데 없는 마음이 든다.

뻗어 나간 마음이 어디에도 닿지 못하여.

굴절되지 못한다. 무릎을 세우고 멍하니 앉아,허무인지, 염원인지, 부챗살처럼 퍼지는 그것을 본다. 문득 일어서면 일렁이며 한 자락 밀려나는 새벽의 어둠. 쌀을 씻으면 뿌연 쌀뜨물이 개수대로 흘러서 내려가고, 새들이 회색 하늘을 가르며 돌아온다. 어디론가 향하던 가닥 없는 마음들도 나에게 돌아온다.



흘러내리고 녹아서 본질까지 닿으려고 하는 것일까? 비명을 지르는 듯 크게 벌려진 입은 원초적 욕망을 보여 준다. 입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하는 인체의 기관이다. 잘근잘근 씹어 삼키는 이빨은 얼마나 동물적인가.

프란시스 베이컨은 정육점의 고리에 걸려 있는 붉은 소고기 덩어리를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정육점에 가면 고기 덩어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고기 덩어리에서, 모든 생명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생명에게서 얻어 왔다는 사실과 생명의 끔찍함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고기 덩어리와 도살장에 관련된 모든 이미지들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라고 하였다. 인간은 육신이 다 스러지면 본질에 다가가 순수해질까? 예술은 늘 질문을 남긴다.



질문의 답을 구하지 못하고 나를 나누어 본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삼면화처럼 삼등분으로 나누어, 세 가지 시선으로 본다. 흐르는 시간 속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해 가는 내가 있다. 그리고 어떠한 흐름에도 바뀌지 않는 내가 있으며, 또한 되고 싶어 하는 내가 있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소망을 그림으로 표현한 원시의 동굴 벽화를 보면, 인간의 갈망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알 수 있다. 끝 간 데 없이 닿을 곳 없는 마음도 갈망과 염원일 수 있겠다.


베이컨의 인물 그림들은 형체들이 부드럽게 사라지는 과정에 있다. 영화 해리 포터 속의 볼드모트 얼굴의 곡선들도 보이고, 커다란 입은 조커와 닮아 있다. 찰흙처럼 매끄러운 촉각으로 느껴진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들로 '감각의 논리'를 쓴 질 들뢰즈는 ' 베이컨의 초상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것이 '왜곡' 임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닮아 있다는 점에 놀라게 된다. 베이컨의 초상은 자아의 한계 지점에 대한 물음이다. 어느 지점의 왜곡까지 인물이 자신이라는 개체로 남을 수 있는가? 어느 경계선에 이르러서야 자아는 본인 스스로이길 중단하는가?'라고 하였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왜곡되는 존재이다.



프로이트는 ' 예술은 소망을 좌절시키는 현실과 소망을 충족시키는 상상의 세계 사이의 중간지대를 이룬다.'라고 하였다.

염원의 풀어 냄이 예술이다. 악, 소리가 나는 듯, 크게 벌린 입은 어린아이의 순수를 뿜어 낸다. 삶이란 참으로 단순해서, 모르는 것 투성이의 이해받지 못하는 왜곡된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에 이르게 된다.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를 했다. 음식물 쓰레기와 소각용 쓰레기를 버리고 뒷 베란다를 마대로 닦았다. 물기를 머금은 타일이 반들거렸다.

뿌연 김이 서린 베란다 샷시에 하트를 그려 보았다. 웃는 얼굴도 그려 보았다. 마음의 얼굴이 조금 따뜻해졌다.

수많은 질문들은, 그냥 넣어 두기로 하였다.

어떤 아침은 그렇게 흘러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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