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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잡문인 Aug 19. 2019

따뜻함과 시원함의 문제

  예전에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잔이 주는 따스함의 문제>라는 문장을 읽었다. 좋은 말이라 생각되어 메모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나, 메모장을 뒤적거리다 저 문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때 문득,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잔이 주는 따스함의 문제’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메모할 때는 깊이 공감했었는데, 문장만 톡 데어 놓고 보니 잘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꾸던 꿈이 사라지고, 그 감촉만 남아 있는 것처럼.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커피 한잔이 주는 따스함의 문제는 대체 어떤 문제일까.

  요즘에는 ‘따아’ 보다는 ‘아아’가 유행이다. 오죽하면 ‘얼죽아’라는 말도 있을까. 그렇다면 유행에 맞춰, ‘커피 한잔의 따스함’ 보다는 ‘커피 한잔의 시원함’이라고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공감이 더 잘 될지도 모른다.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잔이 주는 시원함의 문제>인 셈이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시원함이 더 잘 어울리지 않은지. 따스함보다는 시원함. ‘쿨’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그래서 ‘아아’를 더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카페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세대의 손님을 만났다. 각각의 세대에는 각각의 온도가 있다. 온도 차이가 피부로 느껴진다. 비교적 높은 연령의 세대는 확실히 따듯한 기운이다. 반면 낮은 연령의 세대는 정말 시원하다. 나이로 비교하는 건 치사해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세대가 그렇다는 말이다. 세대에는 세대만의 분위기가 있지 않은지. 비교적 젊은 세대는 확실히 시원하다. 카페나 음료, 서비스에 대해 쿨한 태도를 풍긴다.

  “음, 커피가 셔. 나랑은 조금 안 맞아. 쳇, 어쩔 수 없지.” 하는 식으로 쿨하게 정리해버린다. 나랑 맞지 않으면 안 오면 그만이고, 나와 잘 맞으면 나에게는 좋은 곳이다. 나는 이런 스타일이고, 이 카페는 이런 스타일. ‘난 나고, 넌 너야.’ 같은 식이다. 아주 깔끔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깔끔함을 좋아한다.

  이건 일종에 다름과 틀림의 문제다. 나와 맞지 않다며 틀렸다고 지적하다 보면 끝이 없다. 나를 기준의 중심에 두면 모든 게 힘들다.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피곤해진다. 그러니 복잡하게 굴면서 따지는 것보다, 쿨하게 나랑은 다르네, 하면서 돌아서는 게 편하다. 그런 느낌의 시원함이 확실히 젊은 세대의 손님에게는 있다.

  그런데 사실 모두가 쿨하고 깔끔한 건 아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쿨함’의 탈을 쓴 시니컬한 손님도 있다. ‘쿨함’과 ‘시니컬함’은 명백하게 다르다. 쿨한 손님은 어느 정도 다름을 인정한다. “이 카페는 이렇구나. 어쩔 수 없지.”하고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자리를 일어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특별히 추천하지도, 재 방문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니컬한 손님은 조금 다르다. 냉소적이다. 전반적으로 카페가 자신과 맞지 않으면 “별로다. 맛이 없다.” 같은 태도로 업신여기며 무시하는 태도가… 네, 뭐, 그렇습니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로 흘러왔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지금은 역시 따스함보다는 시원함이 잘 어울립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문장을 고쳤으면 좋겠군요.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잔이 주는 시원함의 문제”가 더 잘 어울립니다.


  그나저나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나는 20대인데, 난 안 쿨한데요?”라던가, “저희 가게 젊은 손님들은 아주 뜨거운데요?”라고 말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성급한 일반화였습니다. 제 글은 어디까지나 피부로 체감하고 느낀,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아, 네. 그렇군요. 그럴지도.”하며 쿨하게 읽고 잊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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