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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Nov 20. 2021

아랫목에 우유를 묻어 두는 밤

요즘의 아침식사

어릴 적 우리 집은 마당이 있는 주택이었고, 집에 아궁이가 있었다. 작은 아궁이었지만 쓰지는 않는 것이어서 그냥 막아두고 있었다. 대신 연탄보일러로 난방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집은 연탄보일러를 기름보일러로 교체를 했고 집의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요즘의 멋진 리모델링은 아니었다. 바닥의 난방선을 새로 깔았고, 방문과 창문틀을 교체했으며, 거실 한 구속에 있던 광을 터서 거실을 넓혔다. 어쩌면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도 "광"이라는 것은 굉장히 생소한 단어일 수도 있다. 다음 국어사전에서 찾은 "광"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광 1 [광:] 

집안에 보관하기 어려운 각종 물품을 넣어 두기 위해서 집 바깥에 따로 만들어 두는 집채

집을 공사하는 동안 우리 가족은 마당에서 살았다. 매일 저녁 캠핑을 하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요즘 같은 훌륭한 캠핑 용품이 많지 않았다. 마당의 냉기에서부터 떨어지기 위해 나무로 만들어진 사과 상자를 쭉 깔아 침대처럼 만들었다. 툇마루와 우리 집에 있던 간이침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자리였다. 어렸던 나와 동생들은 그저 여름밤이 너무 즐거웠다. 밖에서 실컷 뛰어놀고 아직은 환한 저녁시간에 집에 오면 엄마와 할머니는 저녁을 만들었고 마당에 모여 저녁을 먹고는 잘 준비를 했다. 아빠와 할아버지는 사과상자와 간이침대를 설치했고 엄마와 할머니는 그 위에 두툼한 이불을 깔아 두었다. 그러고는 그 위에 커다란 모기장을 두 개로 나누어 치고는 모기향을 피웠다. 시골의 여름은 모기와의 전쟁이었다. 마당에서 자던 그 해 여름뿐만 아니라 매해 여름에는 파란 그물망으로 되어 있는 모기장을 쳤다. 모기장은 저녁상이 물러지면 바로 이부자리와 함께 쳐야 했다. 모기가 집안으로 몰려들어오기 전에 빠른 속도로 설치를 해야 했고 모기장 안에는 두툼한 이불을 깔아 이불속으로 모기장 가장자리를 다 넣어야 모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는 혹시나 들어왔을 모기를 없애기 위해 모기향을 피워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의 반은 집 앞마당 캠핑으로 즐겁게 보냈다. 지금 생각하니 어른들은 힘들었겠지만 우리 삼 남매는 마냥 좋았다.

연탄보일러를 땔 때도 기름보일러를 땔 때도 우리 집에는 아랫목이 있었다. 그중 단연 연탄보일러의 아랫목이 제대로 된 아랫목의 역할을 했었다. 연탄보일러에서 들어오는 열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연탄보일러가 있던 부엌과 맞닿은 벽의 바닥 장판을 진한 갈색이 나도록 태웠다. 거기가 바로 아랫목이다. 그 자리는 뜨거운 자리였다. 연탄을 활활 태우지 않아도 따뜻한 자리였다. 겨울에 골목에 나가 고드름도 따고 빙판 미끄럼도 타고 눈싸움도 하며 손과 발이 꽁꽁 얼었을 때 잠시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 손발이 간질간질하도록 언 손과 발을 녹여주었다. 엄마가 찐빵을 만들어 주는 날에는 막걸리를 넣은 밀가루 반죽이 잘 부풀도록 아랫목에 넣어 두었다. 밀가루 반죽이 두세 배가 되도록 부풀어졌다. 전기밥솥이 없었던 우리 집은 아마도 전기밥솥이 없던 집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늦는 날이거나 아침밥을 많이 해서는 찬합에 갓 지은 밥을 담아 뚜껑을 엎어 아랫목에 묻어두었다. 알록달록한 담요가 찬합 위에 묵직하게 올라갔다. 아랫목은 우리 집은 온장고였다.

아파트에서 가스보일러를 쓰는 지금 우리 집은 아랫목이 있을까? 나는 미미하지만 아랫목이 있다고 생각한다. 방바닥에 손을 대고 더듬어 보면 보일러에서 뜨거운 물이 흐르는 그곳이 느껴지는 것 같다. 집에서 가장 따뜻한 곳 안방이라 불리는 침실의 한 구석이 내 마음속의 아랫목이다. 오래전 우리 집의 온장고였던 아랫목은 차가워진 날씨에 우유를 발효시켜 요거트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냉장고의 요거트가 떨어질 쯤이면 유리용기에 우유와 요거트 한 병을 잘 섞어 뚜껑을 잘 닫아 안방 아랫목에 묻어둔다. 알록달록한 담요 대신 이케아에서 산 손님용 이불을 덮어둔다.


왼: 침대 옆 구석 아랫목에 유리 용기에 담은 우유를 잘 놓아둔다. 오: 유산균이 더 잘 발효되라고 이케아에서 산 손님용 이불을 덮어준다.

아랫목에 우유를 묻어두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 점심시간쯤 이불을 걷어보면 탱글탱글한 요거트가 잘 만들어져 있다. 전기밥솥이나 요거트 메이커를 이용하면 쉽게 만들 수도 있지만, 그때그때 밥을 지어먹는 우리 집에는 전기밥솥이 없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요거트 메이커도 쓰고 싶지 않아 귀찮고 할머니 같은 방법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밤마다 요거트를 아랫목에 묻어두고 잠이 든다. 잘 만들어진 요거트는 그냥 먹기도 하고 채에 유청을 거른 후에 그릭 요거트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왼: 점심시간에 확인하면 순두부처럼 탱글탱글하게 요거트가 잘 만들어져 있다. 가: 채에 유청을 걸러 그릭 요거트를 만들기도 한다. 오: 요거트 아침을 들고 서재로 출근을 한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요거트에 주말이면 구워놓는 그래놀라 한 줌과 딸기잼이나 메이플 시럽을 올려서 먹으면 든든한 아침식사가 된다. 가끔 바나나를 올리기도 하는데 더욱 속이 든든해진다. 재택근무라 아침을 거르기 일쑤인데 요즘은 아침을 꼭 챙겨 먹게 된다.

침대 옆 아랫목에 우유를 묻어두는 밤이면 찬합에 정성스레 밥을 담아 아랫목에 잘 묻어두던 할머니의 손길이 생각난다. 30여 년 전에는 갓 지은 밥을 지금은 우유가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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