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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차 Jan 05. 2024

감자수프

#10

 나는 조금은 당황했지만 금세 웃으며 ”네.”라고 답했고 할아버지는 천천히 접시를 놓고는 앉으셨다. 수미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는 내게 궁금한 게 있나 보다. 수미에게 해줬던 얘기들을 똑같이 할아버지에게 했다. 나는 한국에서 무역일을 하고 있는 이인성이라는 사람이며, 나이는 30대 중반이나 현재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 까지도 말했다. 수미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던 부분도 말해버렸다. 나이 든 사람의 푸근함은 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다 뱉어내게 하는 마법 같은 능력이 있다. 물론 그 마법은 나에게만 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휴가 차 여기에 왔는데, 사실은 어떻게 휴가를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너무 바쁘게 살다 보니 꿈과 현실이 마구 뒤섞인 기분이라는 것까지 토해내듯 얘기했다. 할아버지는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으셨다. 할아버지의 미소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뜻인 것만 같았다. 처음 ”반달”에 왔을 때, 수미의 검은 눈동자가 우리 집 앞의 그 식당의 여주인의 파란 눈동자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색만 다를 뿐 왠지 같은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회색코트의 할아버지와 한참을 얘기를 하다 보니, (실은 나 혼자만 들떠서 많은 얘기를 했다. 할아버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기만 하셨다.) 그 식당의 여주인의 눈동자색과 회색코트의 할아버지의 눈동자의 색이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색도 같을뿐더러 눈의 깊이도 같고 눈빛도 같았다. 알 수 없는 아마도 향수가 같은 게 아닐까 싶지만, 좋은 향기도 같았다. 할아버지는 주문한 음식을 천천히 다 드셨고, 늘 가게를 나가시던 그 시간보다 10분쯤 더 지나 있었다. 회색코트의 할아버지는 ”오늘은 좀 늦었네요. 미안하지만 먼저 가 볼게요.”라고 하시고는 천천히 자리를 뜨셨다. 나는 할아버지께 자주 봬서 좋았다고 이렇게 얘기를 나누게 되어 더 좋았다고 하고는 가벼운 목례로 할아버지를 배웅했다. 

 다시 나와 수미 둘만 남은 ”반달”. 오늘은 왠지 점심도 여기서 먹고 싶었다. 나는 수미에게 따뜻한 수프, 커다랗고 담백한 빵, 그리고 커피를 더 주문한 뒤에 음식을 기다렸다. 빵과 커피와 차를 파는 가게인데 조금은 독특하게 따뜻한 감자수프가 메뉴에 있다. 고소한 감자수프의 냄새가 주방에서 흘러나왔다. 수미는 커다란 보울 가득히 감자수프를 담고 바구니에 큼직하게 썬 빵을 가져다주었다. 빵을 뜯어 감자수프에 푹 담가 먹었다. 냄새보다 더 고소한 맛이 났다. 빵 바구니 아래에 은색의 반짝이는 숟가락이 놓여 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풍경이다. 숟가락을 들어 감자수프를 떠먹었다. 고소하다. 조금은 늦은 듯 하지만 점심시간이 되어서 인지, 가게에 손님이 북적댄다. 늘 점심시간 이전에는 가게를 나가서 인지 이렇게 가게 안에 사람이 많은 것은 처음이었다. 다들 감자수프와 빵을 한 덩어리씩 사서 포장해 나간다. 가게에 앉아 조금은 느긋하게 늦은 점심을 즐기는 이들은 드물었다. 그들을 표정과 말투를 자세히 그러나 티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서울에서부터 들고 온 책의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는다. 여전히 처음 시작한 곳에서 진도가 많이 나가지는 않았다. 책에 집중할 수가 없다. 여전히 나는 주변을 살피고 “반달”에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고는 한참 동안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나에게 주는 진정한 휴식. 나도 그리고 내 영혼도 쉬는 시간. 나도 슬슬 일어났다. 수미에게 내일 보자고 인사를 한 뒤에 해변가로 나갔다. 말뫼는 바닷가에 위치한 도시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가서 산책을 했다. 노을빛이 바다 위로 부서져 반사되었다. 조금은 눈이 부시다. 크게 숨을 들이 마시니 차가운 공기가 폐 가득히 차오른다. 머리까지 맑아지는 차가움이다. 지금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바다를 바라보면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여전히 나와 나의 영혼은 휴식 중. 한참을 걷다 보니, 바다가 온통 어두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해가 이미 많이 졌다. 이곳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겨울이면 해가 너무 일찍 져버린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걷다 보니 이미 가로등이  켜져 있고 작은 가게들로부터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반달”이 나온다. 아직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밤에 본 ”반달”의 불 빛은 오렌지 빛으로 따뜻하다. 배도 살짝 고프고 해서 다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수미가 늘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앞치마를 개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문을 닫으려고 한다며, 혹시 포장하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혹시 저녁에 약속이 있냐고 없다면, 나랑 간단히 저녁을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빙긋 웃더니 그러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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