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핏터라면 와드를 미리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겨요
직장인의 최대 관심사가 오늘의 점심 메뉴라면, 크로스핏터의 최대 관심사는 오늘의 운동, 바로 ‘와드(Workout Of Day)’다. 매일 달라지는 운동, 그래서 매일 새로운 운동을 할 수 있는 게 크로스핏의 특징이다. 와드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는 그저 외국에서 건너왔다고 엄청 티 내는구나? 했는데, 이젠 와드라는 단어를 빼놓고 크로스핏을 말하긴 좀 곤란하다.
크로스핏은 여러 종목의 운동을 섞어서 수행한다. 맨몸으로 할 수 있는 것부터 기구를 이용해 하는 운동까지 다양하다. 운동을 수행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라서 방식, 종목, 횟수 등을 조합하여 와드를 짠다. 매일 달라지는 와드를 하다 보면 비록 몸은 힘들지언정 지루할 틈이 없다. 몸의 특정 부위를 집중적으로 단련하는 헬스는 정적인데 비해 복합적인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퍼포먼스 형태의 크로스핏은 매우 동적이다. 크로스핏을 설립한 그렉 글래스만 코치에 의하면 크로스핏을 통해 기본적인 신체 능력인 근력, 근지구력, 심폐지구력, 유연성은 물론, 협응력, 민첩성, 균형감각, 정확성, 파워, 속도 등을 기를 수 있다. 이쯤 되면 운동계의 ‘사기캐’ 아닌가 싶다만.
꾸준히 크로스핏을 해온 나에게는 미리 와드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다. 온라인 카페에 그날의 와드가 올라올 즈음이면 스마트폰을 열어 곧장 확인하는 회원이 바로 접니다. (손 번쩍!) 호기심을 넘어 확인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이다. 집착이라고 해도 건강한 집착이다. 운동할 생각이 없으면 이런 집착도 없으니까. 간혹 정말 하기 싫은 운동이 나올 때면, 하기 싫어 죽겠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간다. 크로스핏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크로스핏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모르는 동작이 너무 많아서 미리 와드를 확인하면서 그 동작들을 찾아봤다. 온라인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많아서 거의 대부분 무슨 동작인지 알 수 있었다. 영상까지 보면서 미리 이미지트레이닝할 정도의 모범생은 아니었고, 대충 어떤 동작인지 파악하는 게 다였다. 가끔은 와드를 예측해 보기도 했는데, 별로 정확한 적은 없었다. 예측한다기보다는 제발 이것만은 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자주 했지만. 아무튼 학창 시절에도 안 하던 예습의 재미를 크로스핏에서 느낀다.
크로스핏에 대한 몇 가지 선입견 중에는 크로스핏은 운동을 잘하는 사람만 한다, 운동감각이 없거나 처음 하는 사람에겐 진입장벽이 높다, 인싸가 아니면 하기 힘들다…. (하, 어디서부터 생각을 뜯어고쳐야 하나.) 일단 나를 예로 들자면 ISFP, 집순이, 예민보스로 365일 아싸인 사람이다. 헬스는 트레드밀 달려본 게 다고 3개월 정도의 요가를 한 게 운동 경력의 전부였다. 처음은 누구나 힘들다. 몸 여기저기가 불편해지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한다. 그런데도 재밌거나 마음에 들면 계속 하게 된다. 진입장벽 운운하는 것은 정말 겁이 나서일 수도 있지만 별로 끌리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정말 해 보면 알 텐데. 이 얼마나 재밌는 운동인지. 해봐야 나하고 잘 맞는지 아닌지도 알게 될 테고.
크로스핏 관련 SNS를 팔로우하다 보면 아직 어린 청소년이나 관절이 약하고 근육이 거의 없는 노인이 크로스핏 동작을 하는 걸 심심찮게 본다. 심지어 한 쪽 다리 혹은 팔이 없는 장애인이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크로스핏하는 모습을 보면 내적 감동이 밀려온다. 아, 정말 불가능이란 없구나. 아, 각자의 신체 능력에 맞춰 다양하게 진행할 수 있구나.
크로스핏은 운동을 처음 해도, 잘 하지 못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왜냐하면 동작의 수준, 즉 강도와 횟수, 속도나 무게 등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얼굴 생김새가 다르듯 신체의 특징도 다르다. 타고난 신체 능력도 다를 수밖에. 본인이 가진 신체능력에 맞게 운동을 조절하여 진행한다. 중요한 것은 본인에게 맞는 자극과 강도로 운동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 역할을 위해 전문가가 코치해 주는 것이고. 훌륭한 코칭과 꾸준한 연습이 뒷받침되면 위에서 말한 열 가지 몸의 기능들을 발전시키는 게 정말 가능해 보인다.
그러니까 크로스핏은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힘들다. 오랫동안 해왔다고 수월해지는 거? 크로스핏터는 그런 걸 기대하는 법이 없다. 이 운동의 기본값은 내 몸을 혹사시키는 것, 본인이 가진 체력의 최대치를 꺼내서 다 쏟아붓는 것이다. 힘드니까 대충 하고 끝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으니까 걱정 말고 온 힘을 다해서) 죽을 정도로 몸을 움직이고 나면 끝났을 때 맛보는 쾌감도 그만큼 커진다. 오늘도 와드 한 판 잘 끝냈구나.
와드를 끝내면 칠판에 자신의 기록을 적는다. 기록하면 남는다. 그 기록을 통해 다음에 얼마만큼 더 향상되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내 체력과 동작을 수행하는 능력이 얼마나 나아졌는가 확인하는 척도가 바로 기록이다. 내 기록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록을 통해서도 더 나아지고 싶다는 호승심이 든다.
여전히 나는 운동하러 가기 전 와드를 확인하는 게 행복한 루틴이다. 와드는 내가 좋아하거나 잘하거나 싫어하거나 못하는 것이 나온다. 그래도 드는 생각은 늘 한결같다. ‘무진장 힘들겠군.’ 그래서 와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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