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나기

역대급 하루를 보내고

by 편린

역대급 힘이 들었다고 표현이 가능한 날, 오늘이 딱 그랬다. 이틀 동안 쌓인 호박더미들을 전부 손으로 담아 포장하는 데 꼬박 여섯 시간이 걸렸다.

집을 나선 순간부터 비가 내리치기 시작하더니, 7시면 잦아든다는 일기예보는 오늘도 역시나 맞지 않았다. 10시가 돼서야 빗줄기가 약해지더니 11시가 다 돼서야 조금씩 구름이 젖히기 시작했다.

포장을 끝낸 상자들을 트럭에 전부 실어 12시가 되기 전까지 옮겨놔야 해서 평소보다 두 배의 물량을 포장해야 하는 일요일은 다른 날보다 부담이 많다. 박스를 접고 호박을 담고, 잘 닫아서 옮겨놔야 하는 것까지 작업의 과정이 길다.

한 번 앉아서 쉬면 금방 지치기 때문에 가급적 몸을 멈추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5분을 아껴서 작업이 끝날 무렵에 손톱만큼의 여유를 갖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 같은 날은 제한시간에 딱 걸쳐서 일을 끝냈기 때문에 어떤 여유도 갖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다행스럽고 뿌듯했던 시간이었다.


일을 마치고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읍내로 나왔다. 오늘처럼 정신없던 날에는 특별히 외식을 한다.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중국냉면을 먹었다. 보통은 자장면을 즐겨 먹는 데 오늘은 새롭고 특별한 맛이 필요했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힘이 들어서 사실 뭘 먹어도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지만. 일이 힘들어도 끝에서 맛보는 가족과의 식사시간이 있어서 그나마 버틸만한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제 오후에 미리 박스를 접으면서 걱정을 조금 하긴 했다. 호박들이 미친 듯이 쌓여가는 데 네 명이서 따고 포장하고 옮기고. 모든 걸 해야 한다는 게 가능하긴 할까, 뭐든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결국엔 해냈지만.

집으로 돌아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영화를 한 편 보다가 스르륵 잠에 드는 시간이 꿀처럼 달았다. 평소 같았으면 게으르다고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상이었겠지만, 요즘은 이런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커피 한 잔과 막대 아이스크림 하나가 세상에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은 지쳐 쓰러지지 않는 내가 대견하다. 4시부터는 다시 몸을 일으켜 빨래도 정리하고, 시원한 물을 한 컵 떠두어 나눠 마시면서 구석구석 청소를 시작한다.
설거지를 하고 밥을 안치는 일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예전에는 엄마가 어린 우리들을 키우면서 온갖 집안일을 했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해 보기도 하면서 반대로 나는 최대한 즐겁게 집안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이제껏 크고 작은 목표를 세우고 줄곧 잘 이뤄내며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여름만큼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나 생각해 본다. 동시에 몸 쓰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오면 나는 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조금은 힘이 더 세졌을 수도 있고, 전보다 체력도 좋아질 수도 있고.

어떤 일이든 시작에 앞서 크게 무서워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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