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수박 한 통을 뽀득뽀득 닦았다. 반으로 가른다. 잘 익었는지 흡족한 쩍! 소리를 낸다. 잘린 면이 아래로 가도록 안정감 있게 도마 위에 올린다. 빨간 속살이 드러날 때까지 무한 반복. 껍질을 벗겨낸다. 껍질에 빨간 속살이 달라붙어도아까워 않는다. 이번엔 껍질을 먹을 거니크게 상관없다.남은 반통도똑같이.껍질 수확에 들어간다.
평소 같으면 바로 직행 버스 태워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보냈을텐데. 이번엔한 조각 한 조각소중히 모았다. 마치 알맹이와 거죽 입장이 뒤바뀌기라도한 듯.어느새 껍질은 양푼 한가득이 되었다.
이번에는 과도를 이용. 바깥 초록 겉껍질을 벗겨낸다. 하얀 부분이라도 단단하다 생각되는 부분은 과감히 잘라낸다. 야들야들 흰 속살만 남긴다.
그럼 이제 거의 다 온 셈이다. 수박 속살을마음 가는 데로 채 썰어톡톡 소금을뿌려 둔다. 30분 후 물기를 꼭 짠다. 고추장+고춧가루+설탕+액젓+간 마늘+깨소금+ 참기름.양념은기호에 맞게 가감.오이무침 하듯 조물조물 머무려 낸다.수박 껍질 무침은 오이와 노각 무침과는미묘한 차이가 있다.오독오독 좀 더 단단한 식감이 매력적이다.
수박껍질 무침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해주셨던 음식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요즘.수박껍질까지 먹겠다니. 어찌 보면촌스럽고 궁상떠는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난 이 음식에서 할머니를 느낀다.할머니는 뭐든귀히 여기고 허투루 버리는 것이없으셨다.수박 껍질도 맛깔나게 무쳐내 여름 밥상 위별미처럼올리곤 하셨다.
손이 많이 가서 자주 만들지는 않지만 나도여름이면꼭한 번쯤 해 먹는다. 그리고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수박 껍질을 다듬고 갖은양념 넣어할머니가 하듯 그렇게 흉내를낸다.
갓 지은 뜨끈한 쌀밥 위에 막 무쳐낸 생채를 넉넉히 올려 쓱쓱 비빈다.그냥 먹어도 좋지만 달걀 프라이 하나 얹고,참기름까지 한 바퀴더돌려주면.
그건 사랑이 된다.벌써 침샘이 마중을 나오다니. 서둘러한숟가락 그득 떠올려 입 안으로 가져간다. 혀에 닿자마자 어느새 나는할머니를 만나러어린 시절로내달린다.
잠자리에서 들려주시던
백번 만 번 들어도 질리지 않았던 6.25 이야기
잃어버릴까 바지 안 꼭꼭 숨겨꿰매두셨다던주민증
코앞까지 날아들었던 순찰기
할머니집 앞마당 알록달록 너른 채송화
반짝반짝 윤이 나던 쪽마루
미제 체리 가루 주스와독특했던 그 맛
장에 가서 사주신 소매가 풍성했던 원피스
그리고 큼직한리본이 달린 빨간색 샌들까지...
할머니 인생 후반기는 두 번의 고관절 수술로 휠체어에 의존해야만했다.한 번을 편히 눕지 못하고생활하셨다. 심지어 잠도 앉아서청할 수밖에 없었던우리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