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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석 Apr 30. 2020

허무주의에 빠진 아이와 잘못한 아버지의 문답

어느 날 한 아이가 허무주의에 빠졌다. 학교도 나가질 않고 밥도 먹지 않았다. 이에 걱정이 된 아버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본다.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 삶에 담긴 부조리한 고통을 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죠? 저는 쾌락 기계가 있다면 거기서 살 거예요. 모든 의미, 목표, 가치 모두 고통스러운 과정이에요. 그렇다면 차라리 고통스럽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게 좋지 않나요?



부: 감각은 우릴 기쁘게 하고, 화려하게 만들거든. 그럼에도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배반이란다. 때문에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거야. 때론 곰팡이가 핀 쿠키처럼 소위 '나쁜' 것들이 다가올 때도 있어. 하지만 그 역시 너의 일부이고 또한 삶의 일부이기에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거야.



자: 잠깐만요! 저는 그 말은 이해할 수 없어요. 왜 나쁜 걸 그냥 놔둬야 해요? 좋은 거로만 살면 안돼요? 



부: 아하, 내 말은 그저 나쁜 게 필요하다는 말이 아냐. 어떤 상황이든 그림자는 진다는 거지. 쿠키가 언제라도 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너는 단 걸 좋아하지, 쓴 건 싫어해. 하지만 쓴 맛이 없고 단 맛만 있다면 금방 단 맛이 싫증 날 거야.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 말을 믿는 게 좋을걸. 거기다 사람들은 전부 뚱보가 돼서 소방관이나 병사를 할 사람은 남아있지 않을 거야. 그 쓴 맛이 단 맛을 달게 유지해 주는 비법인 거지. 내가 너를 만지면 느낄 수 있지. 어떤 느낌은 좋고, 어떤 느낌은 그냥 그렇고. 하지만 내가 널 때린다면 너는 기분이 나빠질 거야. 그렇다고 느낌을 받지 않으려 한다면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남지 않을 거야. 기분 좋은 포옹을 받으려면, 뺨을 맞고 아플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하는 거야. 너는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지. 어떤 걸 사랑하고, 좋아할 수 있어. 반면에 싫어하고 증오할 수도 있어. 하지만 싫다는 생각을 없애면, 좋다는 느낌도 사라질 거야. 그렇다고 좋고 싫음을 모두 끊어버리면 그때 사람은 그저 고기 기계가 되겠지. 우리는 나쁜 기분을 지울 수 없단다. 사실, 나쁜 기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야. 여기서 중요한 건 나쁜 기분이 날 잡아먹지 못하게 스스로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지. 지금 너는 회의라는 나쁜 기분에 잡아먹혀 있는 거야.



바: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사람은 나쁜 걸 줄이려고 하잖아요. 가난, 질병, 차별, 다툼 같은 거요. 그 궁극적인 목표가 결국 영원한 쾌락 아니에요?



부: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툼, 차별, 가난을 좋아한단다. 질병은 잘 모르겠지만. 네가 할당된 브로콜리를 네 동생에게 억지로 먹이 고선 뻔뻔히 초콜릿 쿠키를 받아갔던 거 기억나니? 초콜릿 쿠키를 얻기 위해 남들에게 브로콜리를 먹이는 습관은 누구에게나 있단다. 이건 어떻게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하길 원하고, 더 강하고, 더 가지길 원해. 즉 누군가는 쓸모없고, 약하며, 가난하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야. 굳이 빛 속에 들어앉은 후, 최대한 자기 그림자에 멀어지려 하는 샘이지. 그러나 욕망의 폐해를 알게 되더라도 무엇이든 바라는 걸 멈출 순 없어. 부조리적인 욕구 속에서만 느끼는 감각이 있고, 사람들은 그걸 선망한단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지. 그래서 아마 사람들은 네가 말한 영원 쾌락 기계를 만나도 그걸 즐겁게 여기지 않을 거야. 그 쾌락 기계가 이를 보완해서 현실이 가진 부조리까지 재현한다면, 그럼 그건 현실의 적당한 복제판 그 이상 이하도 아닐 것이고. 완전함을 선망하되 그것에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해치는 거야. 따라서 이미 가지고 있는 잘 활용해 안녕한 삶을 꾸려가야 하는 거지. 지금 너 역시도 너 자신을 해치고 있어. 뭔가 특별한 것을 찾고 싶어서 특별하지 않은 모든 것을 부수고 있잖아. 심지어 그 생각이 자살로 이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질 않았고. 바로 그 특별하다는 생각이 너의 무언가를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야. 바로 그 무언가가 바로 쿠키의 곰팡이 같은 부분, 없앨 수 없기 때문에 존중하고 받아들이되, 잡아먹히면 안 될 부분이지. 하여간. 네 파괴의 방향이 외부로 향하지 않은 것이 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아들은 한번 더 생각해본다. 그러다가 다시 질문한다.




자: 그래도 전 아무 의미 없다는 감정을 지울 수 없어요. 별한 의미가 없다면, 믿을 이유도 없어요. 육체가 결국 고기라면 살아있을 이유도 역시 없어져요. 물론 죽을 이유도 없겠죠. 그리고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셨지만 우주는 결국 먼지에 불과하잖아요. 그리고 결국 우주도 사라진데요. 그 안에 지구는 더 빨리 사라지겠죠. 이런 상황에 눈을 뜨고 살거나, 눈을 감고 영원히 자거나 결국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이죠. 아무 의미가 없어요. 모든 게 허무해요.



부: 사람이 나이 들어 죽는 것처럼 지구도, 우주도 때가 되면 죽는 거란다. 그 안에서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그 사실이 허무해할 이유는 아니야. 네가 우주가 죽는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21세기 지구의 인간 몸으로 유추한 결과잖니? 그 유추가 네 인간스러운 몸에 영향을 끼칠 일이라곤, 좀 더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것 빼곤 없단다. 믿기 힘들지만, 네가 허무하다 지정하는 그 세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심지어 객관적이란다.



자: 하지만 제 몸과 생각도 결국 죽으면 끝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잖아요. 심지어, 지금 제가 통속의 뇌이고 미친 과학자가 전기 자극을 주고 있는 거라 해도 전 그걸 모를 거예요.



부: 네 감각은 그저 거기 있어.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이유로 거기 있지. 너는 무엇이든 느끼고, 생각해. 그리고 그걸 의심하잖아? 사실 그것 만으로 충분한 거야. 네가 느끼는 모든 것이 너의 일부분이란다. 너의 의심부터 감각, 모든 소리와 모든 이미지, 수많은 비극과 희극, 모든 신들과 역사 속 영웅과 왕들, 지금 보는 모든 벽과 저 하늘의 달과 별, 상상할 수 있는 우주의 처음부터 끝까지도 너의 일부이지. 그 모든 것들이 환상이더라도, 너는 그 환상을 품고 있는 너란다. 한번 눈을 감고 네 숨결을 느껴보렴. 네가 살아 있는 한, 네가 느끼는 너의 숨결은 사라지지 않고 네가 느끼는 그 모든 것을 네게 줄 거야. 그리고 그 숨결, 살아있다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거지. 만약 네가 네 생명마저 의심한다면 글쌔, 그럴 수도 있지. 그건 네 선택이니까. 그건 너무 이기적인 행동 아닐까? 만일 네 숨결이 너에게 못된 짓을 해서 토라졌더라도, 화해의 장은 언제나 열려 있단다. 세상에 비천한 생명은 없다는 말, 많이 들어 봤지? 그건 너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야. 그래서 나는 네가 네 감각을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어.



자: 그건...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부: 뭐, 그렇지. 주어졌다기 보단, 느끼고 있는 삶에 더 가깝지만. 네 감각을 한번 믿어 보겠니?



자:.... 네. 알겠어요.



부: 그래, 잘 됐다. 그럼, 감각으로부터의 선물을 줄게. 초콜릿 쿠키야. 네가 우울해하는 동안 너무 오래 굶었다. 아가. 영양상 첫 끼로 적절하진 않지만 맛은 확실하니까. 어서 먹어보렴. 사실 나는 네가 자랑스럽단다. 네 의문은 어쩌면 누구나가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 같은 것이거든. 보통 사춘기에 한번, 그리고 중년에 한번 그 위기가 온단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현실에 묶여서 그 의문을 풀지 않은 체 살아간단다. 그러다가 자신의 의심했다는 사실 조차 잊게 돼. 하지만 너는 의문을 깊게 파고들었어. 그 과정에서 비록 위험한 일이 있었지만, 어떤 보물은 위험을 겪어야만 얻을 수 있기 마련이니까. 결과적으로 의심을 이겨넸고, 너는 네 삶을 더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거야. 




아이는 자신 안의 모순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직 부조리하다는 감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자신이 아닌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물었다.




자: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질문이 있어요. 아빠, 왜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는 거죠? 아빠는 앞에 있는 것을 긍정하라고 말했는데, 왜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걸 부정한 거예요? 실제로 무언가가 있다 생각해야 하지만 왜 자꾸 세상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죠? 학교나 친구들이 절 괴롭히는 건 상관없어요. 아빠 말대로 걔네들은 현실에 시각이 매몰돼 있으니까요. 시험 점수, 딱지, 알량한 힘자랑, 지저분한 기싸움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지요. 그래서 그들이 저를 괴롭히는 건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아빠. 아빠는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왜, 엄마에 관한 일에 계속 함구하시고, 왜 저를 이렇게 회의하게 두신 거죠?



부: 그건, 그건... 나도 완전하지 않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구나. 네가 말한 그 현실에 함몰됐다는 말, 사실은 가상에 속고 있다는 말과 같아. 나도 그 애들과 다를 바가 없었어. 없는 것만 보다가 정작 너를 보지 못했구나. 네 엄마와의 일은... 나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안하다. 이로서 네가 생각 이상으로 많이 아팠다는 건 정말 미안하다. 그래, 내가 정말 곰팡이처럼 행동해 버렸구나. 앞서 말한 모든 것이 변명처럼 변해버렸다. 미안하다.



자: 아빠는 처음부터 어쩔 수 없는 일을 말했어요. 근데 제 눈엔 아빠는 자유롭게 선택을 한 걸로 보이는걸요. 하지만 그 선택으로 저는 어쩔 수 없이 우울해지고, 또 자라서는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겠죠. 그래서 또 아빠처럼 '자유로운' 선택을 하게 될 거예요. 외면하지 말라 하셨지만, 저는 외면하고 싶어도 아빠를 외면할 수 없어요. 이미 저흰 남이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아빠를 부정하면 할수록 제 마음속에 아빠는 더 커지는걸요. 그건 아마 아빠도 마찬가지겠죠. 아빠도 저를 버릴 수 없기에 이렇게 필사적으로 절 설득하고 있는 거예요. 저희는 서로에게 묶여있어요. 저희는 정말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은 걸까요?



부: 자유는 환상이란다 아가야. 운명도 환상이지. 자유와 운명 모두 환상이야. 사회적 규칙 속의 자유와 운명은 있을지 몰라도 인격에선 자유도 운명도 전부 허황된 말이야. 난 차라리 불쾌와 쾌적함만 있다고 생각해. 보통 불쾌할 때 우리는 운명을 찾고 쾌적할 때 자유를 느끼지. 만약 그런 면에서 운명과 자유가 있다 한다면, 나는 인간의 능력은 자유에서 운명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운명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에 있다 믿는다. 그렇기에 더 많은 선택지가 꼭 자유를 의미하진 않는단다. 단 하나의 길에서도 인간은 쾌적함을 느끼고 자유롭다 생각할 수 있어. 자유와 운명이 환상이기에 가능한 거야. 지금 너는 불쾌하기 때문에 운명에 꽉 잡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그걸 일으킨 당사자 할 말은 아니지만 아가야, 그래도 상황은 나아질 거란다. 우리는 우리 관계 속에서 다시 쾌적한 바람을 느끼고, 자유를 만끽할 거야. 약속한다. 그래. 나도 불쾌한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네 엄마와의 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선택을 한 거였어. 너와 내가 이미 얽매여 있지만 네가 그 안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노력 하마. 할 수 있는 만큼 말이야.



자: 아빠가 미운 건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짜증 나지는 않아요. 사실, 저는 아빠를 좋아하는 걸요. 이 모든 감정이 동시에 들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너무 했갈려요.




이제는 아버지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하여 아버지는 그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부: 그럼, 지금 하고 싶은 게 뭐니?



자: 엄마를 보고 싶지만, 아빠가 해 주시지 않을 거고,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선, 다른 맛 쿠키를 먹고 싶어요.



부: 지금 먹고 있는 쿠키를 다 먹으면 주마.



자:... 정말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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