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날 힘들게 했던 선배교사였지만
“어머 선생님, 웬일이에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특수학교에서 신학기를 준비하던 2월 말, 기간제 교사 시절에 함께 근무했었던 기간제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은 우리 학교에서 1년 간 근무하시게 되었다고 하신다. 이 분은 내가 3여 년 간의 특수학교 기간제 생활을 마치고 특수학급에 근무를 시작했을 때 날 정말 많이 도와주셨었다. ‘비빌 언덕’이라는 게 바로 이런 분들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학기 준비를 하느라 바쁜 상황이었지만 수다를 끝낼 순 없었다. 자연스럽게 함께 근무했던 당시 학교 관계자들의 안부를 묻게 되었다. 날 참 힘들게 했던 소년은 지금 성인이 되었고, 고등학교 시절에 동네 공원에서 어느 장애인 여성과 키스를 하다가(…) 경찰서에 인계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여자를 돌처럼 보던 아이였는데 나이 먹고 그쪽으로 눈이 트였구나. 참 친절했던 그 아이의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근무했던 특수교육 실무사들의 안부도 물었다. 당시 그들은 30대 후반이었는데 지금은 50이 다 되었고 심지어 아이들이 군대를 갔다고 한다. 난 그 때나 지금이나 제자리에 있는 거 같은데 남의 집 아이들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나 싶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던 중,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한 인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특수학급 세 반의 총괄 업무를 맡았던, 유일한 정규 특수교사였다. 그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하며 그 분과 근무했던 것이 꽤나 힘들었던지라 교육현장에서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그녀가 내가 사는 지역으로 발령받은 것을 확인해 버렸다. 나도 특수학교 근무를 마치면 지역에 있는 특수학급으로 가고 싶은데… 언젠가 한 번은 또 마주칠 수 있겠단 생각이 드니 입맛이 씁쓸해졌다.
“그 선생님 저희 지역으로 발령받으셨더라고요?”
“너 그분 소식 모르니? 그 선생님 작년에 죽었어. ”
“네? “
전담실 안에 다른 선생님들이 계신데도 불구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죽었다고요? 왜요? 자살이에요?”
그녀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뭔가 씩씩하고 쿨한 인상을 줬다. 특수학급 경력도 길다고 하니 내가 배울 점이 참 많은 분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 인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노란 탈색머리에 레오파드 무늬의 쫄바지를 입고 다녀 교사라기보단 락커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 스타일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다이어트도 열심히 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눈에 다소 뚱뚱했던 난 참 부족해 보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녀의 교실에서 특수교사, 특수교육실무사가 모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주제는 건강.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허리 디스크가 있었다. 평소엔 괜찮지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지없이 허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네가 살쪄서 허리디스크가 있는 거지, 살 빼봐라. 디스크 저절로 낫지.
음… 뭐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매우 부적절한 말이다. 5명 이상의 교직원이 모여있고 하하 호호 웃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무슨 막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때의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이 당황하면 입이 잘 떨어지질 않더라.
그녀의 외모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업무 관련하여 확인할 부분이 있어 그녀의 교실에 갔다. 하지만 그녀는 확인하라는 서류는 보질 않고 내 뱃살에만 눈이 꽂혀있다. 그리고 내 배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이렇게 말했다.
야, 여자가 이게 뭐냐. 뱃살이나 좀 빼라.
이때부터였나, 난 그녀에 대한 정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난 기본적으로 외모품평을 좋아하지 않는다. 외모에 대한 호불호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놓는 것은 참 예의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조심하는데 중년 이상의 어른들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추억을 곱씹을 때면 난 저러지 말아야지, 그런 선배가 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한다.
그녀가 싫어지던 그 시점, 난 어느 업무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꺼내게 된다. 그 업무는 ‘방과 후 교육 기록’이었다. 당시 특수학급에서는 학교방과 후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이 이뤄질 때 임장교사는 해당 수업의 사진을 여러 장 찍고 그것을 4 분할 표 안에 넣는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 수업 내용에 대한 코멘트를 따로 적는다. 문제는 학교방과 후 수업이 매주 2회 있었고, 그것과 관련된 문서를 매번 작성해야 했다. 이 업무는 법적인 업무는 아니다. 총괄업무를 맡고 있던 그녀의 개인적인 컬렉션이었다. 그녀는 매번 그 해당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며 사진이나 문구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수정을 요구했다. 어디에 제출하는 것도 아닌, 개인적으로 모아 놓는 자료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인가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이 업무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용기.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 업무는 법적 업무도 아닌데 매번 작성을 해놔야 한다는 것이 좀 소모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업무는 내년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나의 의견을 들은 그녀의 대답은 아래와 같았다.
야, 기간제면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해. 애가 열의가 있는 거 같아서 뽑아놨더니 되게 요령 피우네.
이 말을 듣고 난 내년에 이 학교에서 근무하기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학기 말에 내년 특수학급 기간제 티오가 1명밖에 나오지 않았고(당시 특수학급 기간제 교사는 2명이었다) 난 다음 해 기간제 교사 모집에 원서를 아예 제출하지 않았다.
이런 씁쓸한 추억을 안겨준 그녀. 참 밉고 싫었던 그녀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당시 그녀의 아이들은 3,4살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당시에도 이제 겨우 초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 손길이 많이 필요한 나이인데 엄마가 그렇게 떠나게 되다니… 이래저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함께 근무했던 당시, 그녀는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를 다녀온 후 출근했다. 그 당시 간절히 빌었던 평화를 이제는 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난 비록 그녀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 그녀의 명복을 빈다. 지금은 부디 평온하기를, 그리고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