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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바람 Dec 23. 2022

잊히길 바라는 사람들 - 우리는 목격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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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 익숙했던 것들이 이젠 익숙해지지 않은 순간이 되어간다. 아니, 어쩌면 그 순간이 악몽으로 떠오르게 된 건지도 모른다. 몇 년 전인지 언급하기 조차 힘든 그 순간. 그때의 수학여행은 분명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수학여행에서 만들어낼 추억들은 분명 고등학생 시절의 정점을 이룰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어린 연인들의 고백이 줄을 이을 수 있고, 혹은 친구들과 몰래 피우는 담배 한 개비의 추억이 무용담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생수병과 물통에 숨겨놓고 들고 온 소주에 과자 봉지 하나를 벗 삼아 밤새 이야기 하던 추억. 그리고 옆 반의 어여쁜 소녀에게, 혹은 잘생긴 소년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던 추억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분명 그 추억들은 우리에게는 꿈만 같은 시절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시간은 악몽이 되었다.

그 악몽은 너무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가족들의 오열과 스승의 절규, 친구들의 슬픔을 뒤로하고,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슬픔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슬픔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 순간을 잊히길 바랐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잔인하게 이야기한다. 교통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된다 한다. 그 아픔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리고 어느 한 편으론, 그 아픔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단지, 슬픔을 이야기하고, 아픔을 이야기하며, 고통을 나누자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을 뿐이지만, 그 이야길 나누자 하는 사람들의 진심 어린 이야긴 정치적인 언동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를 잊어야 한다고 열심히 투쟁한다. 그 투쟁도 다른 투쟁도 아닌, 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폭식투쟁"이었다. 그들의 분향소 앞에서 그들은 피자와 자장면을 시켜놓고 조국의 미래를 논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야길 한다. 잊히길 바란다고 말이다.

이 글을 쓰고자 하였을 때, 주 목적은 우리 주위에 있었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풍경이었다.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되길 바랐다. 물론, 그 안에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분별한 재개발 속에 그 개발의 현장에 진정 혜택을 보는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조명을 해보고 싶었다. 그들은 과거의 유산을 잊히길 원했고, 존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단지 생존의 이야기만 했었다. 그게 이 글의 핵심이었다. 그 핵심의 글을 찍기 위해 열심히 사진 촬영을 하던 때였다. 하지만, 지난 10월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다. 아니, 대한민국 한 복판에서 정말 잊히길 원하는 사건. 아니,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커다란 참사에 모두들 슬퍼하고 오열했다. 당연히, 그 현장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었고,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그 길이었는데, 그 공간이 고통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그 길이 슬픔이 되고 - 아픔이 되며, 잊힐 수 없는 길이 되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젊은이들의 기쁨과 열정을 뽐내던 거리였는데 말이다. 그 거리는 이제 아픔이 되었고, 슬픔이 되었고, 기억하기 싫은 악몽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빨리 잊어버렸다. 뒤집어 단 근조 리본이나, 위패와 영정이 없는 분향소에 많은 사람들은 조문을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갔다. 그들의 아픔과 죽음이 이름 없는 이의 객사가 되어버린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생애를 살아왔는지, 가족의 슬픔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은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뒤집어 단 근조 리본과 위패와 영정이 없는 분향소뿐이었다.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아픔을 너무나 빨리 잊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턴가? 사람들은 "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왜 그곳을 간 것인지? 누가 가라고 떠민 것이냐고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잘못은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 아프고 치열한 현실 속에서 그저 단 하루 즐기고자 원했던 젊은 청년들의 간절함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단지, 그날 하루만큼이라도 툴툴 털어버리고 놀고자 하는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우리는 그날 - 그곳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날 그곳을 편하게 놀 수 있도록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 그날이 아니더라도 다른 날이라도 신나게 놀 수 있었던 환경을 만들지 못하고, 치열한 경쟁만을 남겨둔 어른들의 유산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 모든 순간이 경쟁의 연속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단 하루라도 일찍 태어나기 위한 경쟁. 그 경쟁 속에서 좋은 어린이집을 가기 위한 경쟁. 어린이집조차 태어나자마자 선착순의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유치원은 말할 것도 없다. 유치원 마저 경쟁에서 밀리게 되는 아픔의 순간. 그 이후는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무한의 경쟁뿐이다. 단 한순간이라도 심호흡을 하고 쉴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주질 않았다. 그러다 젊은 청년들의 단 하루의 즐거움마저 악몽이 되고 고통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야길 한다. 노는 게 잘못이라고 말이다.

고통의 연속은 단지 희생자의 몫뿐만이 아니다. 그날 그 순간을 지나친 사람들에 대한 비난. 그리고, 그 현장에서 살아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자들의 고통.  CPR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지켜보았던, 응급처치자들의 악몽들.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없었다. 아니, 그들은 존재자체도 사라져 버린다. 잊혀 버렸다. 그리고 언급조차 하지 못할 사람이 된다. 왜 그 시간에 그곳을 갔는지 비난의 화살이 되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반대로, 평범한 그곳을 왜 악몽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질문하는 사람들은 어디 있는 것인가? 단지, 그 시간에 그곳을 왜 갔냐는 비난만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약 두 달의 시간이 지난 시점. 애써 이겨나가며, 이제 그 아픔을 다시 기억하고 남기고자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는 그 아픔을 언급조차 하지 않길 바라고 있다. 그 아픔을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다시 쏘아 올리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가 잊히길 바란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우린 여전히 살아있고, 숨 쉬고 있으며, 우리의 두 눈은 똑똑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참. 그 보다, 아직 내 카메라의 셔터박스가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목격할 수 있고, 기록할 수 있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야기해야 한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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