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 5화
어제부터 내린 비가 멈추질 않는다.
빗물은 발목까지 차 오르고,
입고 있던 바지와 신발은 물에 젖어 퉁퉁 불어 있다.
오늘따라 큰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게 실수였다.
장마가 끝난 줄 알았다. 그동안 지루하리만치 비가 내렸는데, 한 며칠 햇빛 아래 뜨거운 태양이 비추니 마치 한 여름이 시작된 줄 알았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편하게 걸어가고 싶을 정도로 땀이 흐르던 그날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슬비 같았다가, 어느 순간 소나기 같더니, 그 비는 마치 폭우가 내리치듯 콩 볶는 듯한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떨어진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빗물을 튀긴다. 다들 우산을 쓰고 바삐 걸어가지만, 바닥에 고인물이 이미 신발을 적시고 바지를 적셨으며, 우산이 가린 부위를 피하듯 빗방울은 온몸을 내리친다. 비가 이렇게 까지 올 줄은 몰랐다. 아니, 일기예보에서는 호우주의보라 하였지만 항상 맞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틀릴 거란 희망을 가지고 작은 3단 접이 우산만 들고 갔다. 그날의 비는 그렇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은 조금 어두웠을 뿐이다. 큰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보다, 다 가방 정도만 들고 다닐 뿐이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을 거다. 오늘은 잠깐 비가 내릴 뿐, 그 어느 때와 상황은 비슷할 거다. 항상 그래 왔다. 언제나 비가 내린다 하였지만, 새벽에 잠깐 혹은 밤에 잠깐 내릴 뿐이었다. 어쩌다 새벽에 잠이 깨었을 때 빗소리나 천둥소리에 깬 적이 있지만, 그 빗소리가 아침까지 이어졌던 적은 많지 않았다. 밖을 나갔을 때 젖은 땅과 빗물 냄새를 통해 어제 비가 왔었구나라고 생각할 뿐이다. 항상 그래 왔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밝은 대낮이 어두워질 정도로,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마치 샤워기의 물을 엄청 쌔게 들어놓은 듯, 혹은 폭포 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 듯. 빗소리는 힘차게 내릴 뿐이다. 오늘 같은 날 일 끝내고, 포장마차의 천막에서 비 맞는 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소주 한잔이 생각나는 건 똑같은 마음일까? 하지만 비가 너무 많이 내리다 보면 쉽게 선택을 할 수 없다. 여차하면 택시도 잡기 힘들어지고, 여차하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 난감해진다.
비는 아침 출근 준비부터 힘들게 한다. 걸어놓은 출근복이 눅눅하고, 땀 냄새와 섞여 묘한 냄새를 풍긴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물이 고인 곳을 피해 가느라 꼭 코미디언처럼 걸어 다녀야 한다. 간신히 지하철에 내리면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 때문에 역사 바닥은 축축하고 미끄럽기까지 하다. 마지막으로 지하철에 탑승하면 나와 똑같이 비에 젖고 땀에 절어 함께 섞이며 나는 묘한 냄새가 화장품과 향수 냄새에 섞여 지하철 전체를 채운다. 그렇다 해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당연히 비 오는 날의 직장인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리고 회사에 도착하는 순간, 아무리 불을 환하게 켜놓더라도, 사무실의 분위기는 묘하게 어둡다. 그리고 머리가 젖어 있는 동료들. 땀에 젖었든, 빗물에 젖었든 다들 불편하게 왔음이 틀림없다.
언젠가 모시던 상무님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회사는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닌, 성과와 수익성 창출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 했다. 그러니, 일개 근로자 한 명이 비 오는 날 우산을 쓰고 비를 맞으며 회사를 뛰어가는 거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했다. 그러니 비 오는 날은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 정위치 근무를 하고, 퇴근할 때는 당연히 차가 막힐 테니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가라 했다. 그게 너무나 당연하다 생각했다. 당연히 여름휴가는 주말 포함하여 3일 정도 가는 것이라 생각헀다. 해외여행은 꿈도 꾸질 못했다. 결혼 준비 마저, 눈치를 보며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누군가 우산을 씌워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누군가 씌워준 우산 덕분에 하루를 보내며 힘을 낼 수 있다. 두 딸아이의 미소가 때론 우산이 되어준다. 그리고 와이프와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우산이 되어주곤 한다. 어쩔 땐 친한 동료와 함께 마시는 커피 한잔, 소주 한잔. 그 모든 것들이 비가 휘몰아치는 그날을 잠시나마 피할 수 있도록 우산이 되어주곤 한다. 그렇다. 난 비가 올 것을 대비해 우비도, 장화도 준비 하지 못 한 그런 직장인이었다.
30대 시절에 나는 항상 자신감에 넘쳤다. 조금 내리는 소나기 정도는 나한테 문제 될 게 없었다.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줄 알았고, 남들보다 앞서 나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하루하루 지나며 생각을 해보니, 난 여전히 그대로였고, 다른 후배들은 이미 나보다 더 멀리 뛰어가고 있었다. 알아도 모르는 척, 책임지지 않고 피해나가는 법을 배웠을 것이고, 생각하지 않고 평판을 올리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난 당연히 내가 가진 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소나기 정도는 별 일 아니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은 우비를 준비하고, 장화를 준비했다. 그리고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발목까지 빗물이 차는 순간 깨닫는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느낀다. 당연히 일기예보처럼 비가 내린다 하더라도 잠시만 지나면 그칠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작은 우산 때문에 옷과 가방이 젖은 상태에서 퇴근길을 떠났다. 길은 미끄러운데, 내 구두의 밑창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 번들거려 너무나 미끄러웠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꽈당하고 미끄러진다. 옷은 흙탕물 범벅이 되고, 신발과 모든 게 젖는다. 아마 며칠 전인가? 내가 업무를 가르쳐 주던 후배가 내 상관으로 진급할 예정이란 소식을 들었을 때였나 보다. 당연히 그 후배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던 그런 후배였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누구보다 빨리 이해했고, 나와 손 발이 맞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 후배를 인정받게 해 주기 위해 많이 도와주었다. 경력직이라 적응이 어려울 거라 생각해 더 신경을 썼다. 하지만, 그 후배가 이젠 나보다 더 앞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일기예보를 안 믿고, 내 방식대로 판단해서 그런가? 아니면 남들처럼 한 번, 두 번 더 걱정을 하고 고민했어야 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비를 맞았어도 비 안 맞은 척 앉아 있었어야 하는 건가? 그런 내 머리 위해 떨어지는 빗물의 양도 판단하지 못한 채 작은 3단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걸으며, 빗물이 떨어지는 양 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그런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힘들게 집으로 돌아와 빗물에 젖고, 흙탕물이 묻은 옷을 세탁기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잠시 고민을 해 본다. 언젠가부터 빗물이 떨어지는지 몰랐던 거 같다. 나에게 작은 우산이 되어준 두 딸아이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고민해본다. 내일은 아무리 비가 안 올 거 같더라도, 큰 우산을 들고 가야 한다고. 좀 늦었지만, 그래도 내일부터는 비에 젖지 말아야 한다.
빗길을 해치며 힘들게 걸어온 당신. 오늘 하루도 수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