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mon de Cyrene Feb 03. 2020

이성에 눈을 뜬 건 시작일 뿐이다

연애의 풍경. 4화

'요즘은 초등학생들끼리도 남자 친구, 여자 친구 한대. 요즘 아이들은 뭐든지 빨라. 이성에도 눈을 빨리 떠'라는 요지의 말을 적지 않게 들었다. 그럴 때면 항상 당황했다. 내가 '이성'으로 인지했고, 그 상대의 이름까지 기억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내가 '이성'으로 인지했던 첫 상대는 초등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사람들이 '요즘 애들이 참 빨라'라고 하면 '나도 그 요즘 애들에 들어가는 건가?'라면서 침묵을 지킨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난 우리 또래들에서 유난히 튀는 편은 아니었다. 5학년 때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누가 누구를 좋아한대]라던지 [남자애들 중에서는 000가 가장 인기가 있대]라는 식의 대화가 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내 감정의 흐름은 그냥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증거(?)로 남았었다. 5학년 수학여행을 갔을 때 나의 카메라 속에 내가 당시에 좋아했던 친구의 사진이 가득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수학여행에 가서 찍은 사진의 절반 가량이 웬 여자아이의 사진인걸 보고 '너 000 좋아하지?'라고 했고, 참 순진하고 순수했던 그때의 나는 아니라고 화를 내고 땡깡을 부렸었다.


그 마음들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때 나의 기준으로 상대가 이성으로 느껴졌었다. 물론, 그때 '상대가 이성으로 느껴져'라고 인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가 계속 눈에 들어왔고, 신경이 쓰였으며, 관심이 가고 안에서 뭔가 모를 느낌 또는 감정이 일어났었다.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이 많이 그렇듯, 나도 그 친구에게 감정이 있는 것을 짓궂은 장난으로 표현했고 그 친구가 좋아한다는 소문이 도는 남자애와는 다른 이유로 싸우기도 했다. 그 아이와 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는데, 난 어머니 심부름으로 상가에 다녀오다가 그 친구 방에 불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하고는 했다. 누가 뭐래도 그때 난 그 친구를 이성으로 인식하고, 좋아했었다.


그 나이에 그런 감정을 갖고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괜찮다. 문제는 '어른들의 연애'도 많은 경우에 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감정이 가는 대로, 내 안에서 나도 모르는 뭔가가 작용해서 움직이는대로 행동하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심지어 그런 자기중심적인 감정에 취해서 상대를 대하고, 성인이 되면서 강화된 자기 중심성으로 상대를 억압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껍데기는 커지고 힘은 세졌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갓 이성에 눈을 떴을 때 수준의 감정과 감성이 살아있는 사람들. 심지어는 그런 상태로 결혼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그것이 사랑이며 가정생활에 필요한 전부라고 착각하고 말이다.


연애는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태는  갓 이성에 눈을 떴을 때의 '감정'일 수는 있어도, 그런 상태로 하는 연애는 절대로 건강할 수 없다. 연애를 할 때 그런 감정이 있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런 감정상태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이는 그 감정상태는 '나의 상태'일 뿐이고, 상대는 그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애를 할 때 사람들이 상대가 본인 말을 그대로 듣지 않는다며 짜증을 내고, 화를 내거나 심한 경우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그 관계를 자기중심적으로 인지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끌고 가고 싶기 때문이다.


연애를 그런 감정에만 휘둘려서 해서는 안 되는 것은 그런 감정적인 상태가 만드는 상황들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여자들이 잘생기거나 몸이 좋은 남자를 봤을 때, 남자들이 얼굴이나 몸매가 예쁜 사람을 봤을 때 일어나는 감정이나 내면의 호르몬 작용과 사람들이 '연애감정'이라고 부르는 감정은 사실 사람들이 구분하기 위해 구분할 수는 있지만 그 느낌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감정이나 호르몬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그 대상에게 그대로 표현하고 강요할 수는 없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그것을 연인에게 때때로 강요하는 것일까? 자신이 '사랑'한다면서 자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대를 억압하고, 윽박지르거나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상대를 자신의 호르몬 작용의 분출구인 도구로 여기는 것이지 그것이 사랑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덩치만 큰 어른 아이가 어린이의 감정과 성인의 몸으로 표현하는 감정상태에 불과하다.


연애는 그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결혼생활도 그렇지만 연애도 상대와의 관계에서 나를 깨고, 다듬으면서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사회에,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맞춰야 할 때가 있듯이 연애도 [연인과 나]라는 사회에 나 자신을 맞추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사람들이 이성에 눈을 뜬 시점의 감정상태 또는 연애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드라마에서도 뭔가 사랑은 '빠지는 것'인 것처럼 묘사하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빠지는 느낌적인 느낌이 연애에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연애의 일부에 불과하고, 절대로 연애 그 자체여서는 안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누구도 이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는다. 온라인이나 책들도 당장 연인관계를 형성하고 상대의 마음을 '사는 법' 또는 상대를 '유혹하거나 꼬시는 법'을 말하지 '상대에게 나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법'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글과 책이 넘쳐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연애를 '상대를 소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반대로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는데 기여한다.  


연애에도 수준이 있다. 이성에 갓 눈을 떴을 때 감정만으로 상대를 대하는 [어린이의 연애]에서 그런 마음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두 사람이 모두 상대에게 나를 맞추기 위해서 서로에게 중요하지 않은 작은 부분들은 양보하고, 중요한 것은 다름은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도록 관계를 형성하는 [어른의 연애]까지. 전자의 연애가 '나 중심의 연애'라면 후자는 '나와 상대 사이의 균형을 맞출 줄 아는 연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연애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일어나야 한다. 아니, 결혼한 후에도 그 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 호감, 좋아하는 감정과 사랑은 그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만들어져 갈 것이다.


어린이의 연애가 그런 연애만의 매력이 있는 것처럼 어른의 연애도 그 나름의 매력과 그런 연애가 주는 깊은 감정적인 상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연애가 '낫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아가 형성되는 만큼 상대도 그렇다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나이 들수록 하는 연애는 점점 어른의 연애로 바뀌어 나가야 한다. 연애는 평등하고 독립된 두 사람이 관계를 형성하고 두 사람의 삶이 어느 정도 이상 결합되어가는 과정이니까.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도덕, 율법, 개인성 등을 중시하지 않는 사회라면 그러지 않아도 되겠지만, 우린 모두 하나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연인 역시 그 안에서 형성되는 관계들 중 하나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모유를 떼지 못한 아기처럼 갓 이성에 눈을 떴을 때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는 말자. 그런 연애는 주위에 민폐이고 반드시 피해자를 만든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다양한 주제의 글을 씁니다. 혹시라도 감사하게도 '구독해야지!'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2020년에 제가 쓸 계획(링크)을 참조하셔서 결정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브런치에는 '매거진 구독'이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으니, 관심 있는 매거진만 구독하시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이전 03화 연애가 시작되는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