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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Apr 27. 2020

사랑일까 집착일까?

이별의 풍경. 3화

20대에서 30대 초중반까지 난 꽤나 단호한 연애를 해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내게 맞추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 극복하지 못할 것으로 느껴지는 다름은 곧바로 이별의 이유가 되었고, 상대에게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함께 해결해 나가려 하기보다 나 혼자 결론을 내리고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난 주로 이별을 통보하는 쪽이었고,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면 나와 만났던 친구들은 그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기도 했다더라. 나의 연애가 아주 오래, 몇 년씩 가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숙했다. 후회하냐고? 후회해서 달라질 게 있다면 후회하겠지만, 그때 나의 미숙함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30대 중반 정도에 그렇게 생각을 바꿔 먹었다. 둘 사이에 어느 정도 이상 갈등이 있어도 일단 대화를 통해 풀고 싶었고, 연애 초기의 다툼이나 갈등은 꼭 두 사람이 안 맞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와 내가 모두 나이가 있기에 생각이 많아서 초반부터 부딪히는 것이고, 그 고비를 잘 넘기면 관계가 오히려 빨리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 나는 주로 이별을 통보받는 입장이 되었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결혼을 해야 한단 생각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상대에 대한 판단을 더 빨리 내리기 시작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난 독특한 사람이 되었다.


어느 것이 정답이었을까? 난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연애의 어떤 시점에 결론을 내리든지 간에 상대와 내가 맞지 않는 지점에 대해 최대한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해서, 그게 정말 맞춰지지 않는 부분이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대화를 두 사람이 충분히 하고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한 후에 결정을 하는 게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20대에서 30대 초중반까지 나는 너무 급했다. 상대의 특정한 성향을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판단했고, 그렇게 통보를 해 버렸다. 사실 이별하는 과정에서 상대가 특정한 모습들을 반복적으로 보였던 이유에 대해서 들은 적도 있는데 난 마음속에서 이미 결정을 한 상태였고, 참 어렸던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내 결정대로 밀고 나갔다. 힘들지 않았냐고? 엄청 힘들었다. 내가 이별을 통보하고 나서도 3-4개월을 그 친구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심지어 이별한 지 1년도 더 지난 후에도 그 친구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했고 그 친구도 내 연락을 받았었다. 마음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내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이성으로 감성을 누르며 그 친구를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은 그 친구가 결혼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 계속됐다.


급하게, 일방적으로, 상대와 대화를 해보지 않고 내린 일방적인 결정은 이렇듯 본인에게도 좋지 않다. 이는 상대에게 마음이 여전히 있는 상태에서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가진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멀쩡히 뮤지컬까지 예매해 놓은 상황에서, 다툰 적도 없는데 내게 갑자기 이별통보를 했던 친구는 1년 후에 펑펑 울면서 전화를 해서 '오빠, 내가 착한 오빠를 그렇게 힘들게 해서 벌을 받은 것 같아'라면서 전화를 한 것을 보면 이는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했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고 맞춰가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해야 한다. 여기에서 '충분히'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기에 00개월 또는 0년은 일단 맞춰봐야 한다고 정의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감정이 남아있는 한, 최선의 노력은 다해야 한다. 본인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지 않고 한 이별은 시간이 지나면서 아쉽고, 후회될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나기로 했다면 일정기간 이상은 만나야 한단 것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빨리 이별하는 것이 상책인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은 크게 상대를 자신에게 맞게 일방적으로 바꾸려는 사람과 상대의 말은 듣지 않는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사실 이 중 한 가지 특성을 가진 사람은 나머지 특성도 갖게 되어 있다. 이는 그러한 특성은 개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본인 중심으로 돌리고 싶어 하기 때문에 옆에 오래 있어봤자 서로 맞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연인이라는 관계, 아니 어느 관계에서든지 두 사람은 서로 어느 정도를 양보하며 중간에서 맞춰나가야 한다. 어느 일방이 상대에게 다 맞춰주는 것은 독재나 폭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가 되지 않는, 상대의 말은 들어주는 척만 할 뿐 같은 패턴을 계속 보이는 사람들과는 빨리 이별하는 것이 상책이다.


어떤 이들은 '그래도 그런 사람들과도 노력을 해야 하고, 그 사람이 변할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라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답이 없다. 물론, 그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몇 개월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수십 년이 걸릴지, 아니면 아예 변하지 않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한 불확실성에 모험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그리고 그건 오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를 내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이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연은 타이밍이고, 지금 그 사람이 누군가와 관계를 형성하면서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 사람과는 빨리 헤어지는 것이 맞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미래는 수많은 현재가 쌓여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인과 이별할지 여부를 결정할 때, 자신이 그 사람을 잡고 싶거나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이 사랑인지 집착인지에 대한 판단은 내가 아니라 상대를 두고 해야 한다. 상대가 나의 말을 듣고, 그 말을 존중하고, 맞춰주기 위한 노력을 할 뿐 아니라 작더라도 순간순간 실질적인 변화를 보여주고, 나 역시 상대에게 맞춰주면서 조금씩 바뀌고 변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면, 두 사람이 자주 다툰다고 해도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사랑이다. 하지만 상대가 말로는 알았다고 하고 미안하다고 하지만 변하기는커녕 현실에서 맞춰주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거나 본인이 상대가 본인에게 기대하는 바를 맞춰주지 않게 된다면,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집착이다.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아끼고 소중하는 것에 가까운 수준으로 상대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길수록 그 사랑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아끼고 소중하는 사람을 위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본인과 상대 모두 같이 조금씩 맞춰나갈 수 있는 게 정상 아닐까? 그리고 상호 간의 그 사랑이 클수록 두 사람이 기꺼이 맞춰주는 수준이 더 높아질 것이다. 아니, 사실 사랑이 커질수록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두 사람이 모두 상대에게 맞춰가다가 중간에서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 여기에서 핵심은 그 과정이 '상대와 내가 모두 서로에게' 맞춰가는 것이어야 한다는데 있다.


그렇게 되지 않는, 두 사람 모두 노력하지 않거나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맞추고 노력하는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은 집착이나 소유욕이지 사랑이 아니다. 상대와의 관계에서 같은 문제로 반복해서 부딪히는데 그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거나 상대나 본인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맞춰가려는 노력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화도 나눠보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가 해소되지 않아서 지칠 지경이라면, 일단 헤어지는 것이 맞다. 두 사람이 모두 지친 상황에서는 그 관계가 반전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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