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풍경. 9화
사랑하면 하게 되는 것들보다 더 중요한 건 사실 사랑하면 하지 않게 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이는 사람들은 사랑하면 하게 되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당장 움직이기 위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사랑하는 척하면서 할 때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사랑하게 되면 하지 않게 되는 것들은 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의 가장 큰 특징은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지 않게 된다는데 있다. 이는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가 상대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행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만큼 소중하게 여겨진다면, 상대가 불편하거나 힘들 것을 알면서도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내가 상대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상대가 나와 있을 때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원할 테니까.
스킨십을 강요하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사랑에 기반한 것일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빠 믿지'와 같은 표현들은 상대가 믿지 못하겠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아직은(?) 혈기가 왕성한 남자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20대, 아니 30대 초반까지도 나는 상대가 스킨십에 대해서 힘들어하거나 거절을 하면 내가 내 안에 있는 욕구와 욕망을 견디는 것이 힘들어서 관계를 끝내기도 했을 정도로 내게 있어서도 연인 간의 스킨십은 굉장히 큰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명시적인 동의가 없는 스킨십은 폭력이다. 이는 상대의 동의 없는 스킨십은 그 사람의 몸을 함부로, 물건처럼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이 문제 되는 사안에서 가해자들은 때때로 합의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데, 상대가 적극적으로 다가오거나 반응했다거나 말로 확인된 것과 같은 명시적인 합의의 근거가 있지 않은 이상 합의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이는 특히 남녀관계의 경우 둘만 있는 상황에서 힘이 센 남자가 자신에게 어떻게 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저항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스킨십이 불편해도 상대가 적극적으로 나옴으로 인해 어쩔 줄 몰라서 그냥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명시적인 거절의 의사를 표현한 경우에도 스킨십을 강요한 적은 없지만 나 역시 상대의 명시적인 동의 없는 스킨십을 했던 적이 있고, 그로 인해 사과를 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건, 분명 사과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러한 강요는 스킨십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버거워하는 선물을 강요하는 것도,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일을 '사랑'이란 말로 해달라고 하는 것도 강요에 해당한다. 물론, 내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상대가 정말 싫어하거나 힘들어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그것을 기대한다면, 그건 말로 설명하고 설득해서 상대고 최소한 불편한 마음을 갖지 않고 그 일이나 선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고 상대가 그렇게 해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해야 한다. 여기에서 핵심은 '고마움'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에게 강요를 한 후에 상대가 그 강요에 의해 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그건 상대를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지 절대로 사랑일 수 없다.
반대로 상대가 내게 정말로 뭔가를 강요하는 수준으로 기대하는데 나는 그걸 도저히 해줄 여력이 되지 않거나 해주고 싶지 않을 때는, 그 이유를 솔직하게 대화를 통해 설명해줘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만 정말 그럴 상황이 안되거나 그게 힘들다는 것을 솔직하게 설명한다면,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걸 받아들이고 양보하게 될 것이다.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이고 양보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고마워할 때, 그런 마음을 가질 때 두 사람의 관계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핵심은 '대화'다. 자신이 상대와, 상대에게 그것을 기대하는 이유와 그 의미는 설명하지 않으면 상대는 이를 절대 알 수 없다. 그리고 상대는 '나를 도구로 생각하는구나'라고 오해할 수 있게 된다. 또 본인이 그걸 들어주기 힘든 것도 솔직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상대는 본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상대는 직접 설명하지 않으면, 당신이 그것을 왜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지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이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당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라면, 그걸 설명하는 과정에서 상대도 설득될 수 있다. 설명도 하지 않고 상대가 본인의 요구를 들어주길 요구하는 것은 상대를 종처럼 여기는 것이 아닐까? 특히 연애 초기에 상대가 '탁'하고 알아채기를 기대하면 안 되는 것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상대가 당신을 잘 알지 못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를 사랑하면, 상대가 정말 싫어하는 것은 덜 하게 된다. 최소한 하지 않기 위해 노력은 하게 되고,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그런 노력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할 수 있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술과 담배가 아닐까 싶다. 상대가 다른 것은 다 괜찮은데 담배 냄새가 싫거나 상대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면 할 수 있다. 그런 경우 그 사람의 연인이나 배우자는 상대를 사랑한다면 담배를 피우지 않기 위해 노력은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리고 반대로 담배가 싫은 사람은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가 하루아침에 담배를 끊기 힘들다는 것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이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더 맞춰진다면 두 사람이 서로 수용할 수 있는 타협점을 어디에선가 찾게 되지 않을까?
이처럼 상대가 정말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의 극단은 외도나 바람이 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심지어 본인이 외도를 하는 사람도 자신의 연인이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싫어한다. 그렇기 때문에 외도는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는 것'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양다리 이상을 걸치거나 결혼한 후에 외도를 하면서, 다른 사람과 스킨십을 하고 연인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것도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한 사람 이상을 한 번에 사랑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 본인의 연인이나 배우자가 본인이 그렇게 다른 사람도 만나는 것을 괜찮아한다면, 본인도 본인의 연인이나 배우자가 그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런 사랑도 가능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오픈 릴레이션십을 갖기로 하고, 상대 외에 다른 사람과도 잠자리를 하고 데이트를 하는 연인처럼 지내는 것이 괜찮은 것으로 완전한 합의를 기꺼이 봤다면 그건 두 사람의 관계이고 문제이니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사랑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구심이 있다. 이는 두 사람이 '사랑'한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계속해서 더 깊게 이해해 가고,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면서 두 관계가 모두 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A와 B라는 사람과 모두 연인 혹은 배우자로써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리고 오늘 정말 힘든 일이 있었다고 해보자. 당신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같은 수준과 같은 강도로 자신의 힘듦을 공유할 수 있나? 정말 기쁜 일이 있었다고 해보자. 당신은 두 사람과 같은 수준과 같은 강도로 그 기쁨을 공유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항상 자신들의 일상을 세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공유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A와 B는 당신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두 사람과 당신의 관계가 깊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A와 B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혹자는 가정과 연인은 다른 것이라며, 결혼을 했어도 연애는 따로 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과 가정을 함께 이룬 배우자의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당신이 가정 밖에서 연인이 있는 것을 당신의 배우자가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런 관계를 가정 밖에서 유지하지 않아야 당신의 배우자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평판을 위해 가정은 유지하면서, 가정의 틀 밖에서 연애는 따로 하고 싶다면 그건 자신의 평판을 위해 배우자를 자신의 종이나 노예로 취급하는 것이다.
연애를 할 때는 물론이고 결혼한 후에도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어떻게 그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으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그러는 것이 용납은 안돼도 이해는 되더라. 그런 일은 (1) 부부관계에서 문제가 있을 때, (2) 상대가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했을 때, (3) 정말로 그래서는 안된다고 밀고 밀어도 두 사람이 계속 서로에게 끌리게 될 때 일어나는데, (2) 번의 경우에는 그런 관계가 본인을 위해서 좋을 것이 없고 (1) 번의 경우에는 새로운 관계로 넘어가도라도 기존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 맞다고 확신되는 경우 끝낸 후에 다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설사 (3) 번의 경우라 하더라도, 본인이 한 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다해서 그 관계를 정리하고 다른 관계로 넘어가는 것이 맞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같이, 동시에 서로 배려하면서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두 사람이 대화를 많이 하고, 서로 존중해주면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게 자연스러워지면 두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일이 훨씬 적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깊어진 관계를 버리고 눈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릴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순간의 욕구와 욕망, 욕정에 다른 사람에게 순간 넘어가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는데, 그런 빈틈은 두 사람이 '사랑'이라는 막연한 표현으로 상대와의 관계가 괜찮을 것이라 믿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지만 그냥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유지되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성과 노력을 다해야만 유지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에는 서로를 더 알아가기 위한 노력뿐 아니라 상대에게 나의 매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포함되어야 하는데, 이는 에로스적인 사랑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지만 사랑의 큰 부분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런 노력은 두 사람이 모두 해야 하고, 상대가 그런 노력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그런 노력을 할 여유를 줘야 한다. 그런 여유를 줄 수 없다면, 상대에게 그런 여유가 없어진 것에 자신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은, 안 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덜하게 될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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