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안 되는 위로의 말들. 18화
노래 가사나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다'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냥 어설프게 친한 친구의 여자 친구에게 호감이 있었다면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에 어떻게든 마음을 표현했겠지만, 당시에 굉장히 친한 친구의 여자 친구였던 그 친구에게 나는 입대하기 전에 빽빽하게 잡혔던 수많은 송별회 중 하나를 마치고, 술에 취하진 않았지만 알코올기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만원 버스 앞문에 가까스로 몸을 끼워 넣은 상태로 통화하면서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지?'라고 말한 뒤 후다닥 수습을 한답시고 정말 좋은 친구로 좋아하네, 어쩌네 라고 말한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당시만 해도 난 '사랑이냐, 친구냐'는 질문에 고민은 하겠지만 '친구'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 이유도 분명했다. 20대 초반에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연인을 선택해도 그 사람과 인연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반면, 친구는 평생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게 그 질문을 한다면? 난 망설임 없이 [사랑]을 선택할 것이다. 이는 나이가 들고, 서로의 상황이 바뀌면 그렇게 절실했던, 내 속을 다 털어놓았던 친구와도 멀어질 수밖에 없단 것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친구도 소중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생존과 생계, 그리고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적 영역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와 직접 연결고리가 없는, 자신과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닿아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영역이 넓어지고, 본인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적 자원은 제한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더라.
서로 그런 상황이 되니 이제는 최소 월 1회는 봤던 친구들도, 더군다나 코로나 시국 하에서는 1년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게 비단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이 신년회나 송년회, 망년회를 핑계로 각종 모임을 하는 건 아마도 1년에 한 번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바쁘게 각자의 삶을 챙기다 보니 올해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은 보자는 게 송년회와 망년회의 의미고, 올해 어찌 될지 모르니 연초에 보고 시작하자는 게 신년회가 갖는 의미가 아닐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 보니 진짜 친구라면, 상호 간에 신뢰가 있는 친구라면 상대에게 섭섭함을 느낄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를 이해해 줄 수 있게 되더라. 20대 초반에는 내 여자 친구와 친한 친구를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없다는 게 싫어서, 그게 힘들 것 같아서 항상 사랑보단 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난 연애를 하면 보통 둘이서 하지 지인들과 함께 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처럼 내 경험치에서 알고, 상상할 수 있는 게 실제 현실과는 괴리가 클 수 있단 것을 알기에 나는 지금 선택하라면 망설임 없이 사랑을 선택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내가 사랑을 선택할 또 다른, 어쩌면 가장 큰 이유는 나이가 들수록 내가 편하게, 상대에게 미안해하지 않고 전화하고, 힘든 것을 털어놓을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내 주위에는 나의 그런 힘든 마음과 상황을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너무 힘들고, 우울감이 몰려올 때는 3-4 사람과 돌아가면서 총 6-7시간을 통화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상대의 성별과 무관하게 상대가 결혼을 하면, 그런 전화는 하지 못하게 되더라. 상대도 고민이 많단 것을 알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경우에는 내 얘기를 다 들어주고 있을 여유가 없단 것을 알기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변하다 보니, 항상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더 중요하고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언제든지 연락해'란 말이 매우, 굉장히 소중하고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언제든지]라는 말이 결코 가볍지 않단 것을, 그 말을 누구에게나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조건 없는 관계,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관계를 형성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진 세상인가? 아니,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니라 위에서 말했듯이 인간이 갖는 자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조건 없는, 시간의 제약을 두지 않는 제안은 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언제든지 연락해'라고 해서 정말 '언제든지' 연락했더니 상대가 '지금은 조금 곤란한데...'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연락해. 네 일이라면 내가 언제든지 당연히 1순위로 여기고 달려가지.'라며 공수표를 날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상대가 연락이 오면 뒤에서 '연락을 하라고 했다고 진짜 할 줄은 몰랐다'며 어처구니없어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언제든지 연락해'란 말이 오히려 더 큰 상처를 가져오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수록 '언제든지 연락해'란 말은 고맙게 느껴진다. 이는 그래도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나 서로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쉽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그런 말을 남발하던 사람도, 이기적이지만 않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그러는 것이 상대를 힘들게도 하고 본인도 귀찮게 만든단 것을 알기 때문에 '언제든지'란 말은 잘하지 않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 말을 남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사기꾼들 뿐일 것이다. 사기꾼들이 그런 말을 남발할 수 있는 건 역설적이게도 정상적인 사람일수록 '언제든지 연락해'라고 했다고 해서 실제로 연락을 해오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누군가가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정상적인, 조금이라도 이타적인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대도 쉽지 않은 상황에 있단 것을 알기 때문에.
여기에서 또 한 번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이상의 친밀감이나 유대감이 있는 사람, 이기적이지 않고 개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연락해'라고 말한다. 이는 그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정말 힘들 때도 내게 연락을 하기가 힘들단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런 메시지를 던져 놓으면, 사람들은 본인이 정말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을 때 그 말을 했던 사람에게 연락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그런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연락을 받으면 난 그 사람에게 기꺼이 통화든, 식사든, 티타임이든, 내 시간을 낸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단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서로 하는 게 많아지고, 책임과 의무가 많아질수록 서로 연락하기 힘든 세상에서 '언제든지 연락해'란 말 한마디는 때때로 우리에게 실낱같은 구멍을 통해 볕이 들게 해주기도 한다. 내가 정말 힘들 때 연락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언제든지 기꺼이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얼마 전에 일 때문에 10년 전에 일하던 회사 형님들께 연락을 드릴 일이 있었다. 희한한 게, 난 회사를 20대에 떠났는데 40대가 되어서도 내가 그나마 연락을 주고받던 회사 선배들은 내 바로 위가 아닌 10살 전후로 많은 선배들이더라. 내가 그럴 수 있는 건 어쩌면 내가 회사 다닐 때 지금 나 정도 나이였던 그 선배들이 내게 조금은 더 시간과 마음을 내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번에 연락해서 부탁을 했을 때도 그 선배들은 기꺼이, 네 부탁인데, 우리 식구였던 사람의 부탁인데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얼마든지 도와주겠다고 하시더라.
조건 없이, 오롯이 나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언제든지'를 말해주셔서 감사했고, 감동했다. 또 반대로 그 선배들은 내가 그럴 것이란 것을 아셨기 때문에 기꺼이 '언제든지'를 말해주지 않았을까.
이처럼 '언제든지'란 표현은 상호 간에 얼마나 신뢰가 깊은지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란 말은 쉽게 하지도, 듣지도 못하지만 그 말은 한 번 들으면 따뜻한 잔상이 꽤나 또렷이 남는 말이 되었다. '언제든지'라는 말만큼 네 글자로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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