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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Aug 12. 2018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

똑같은 인간은 없다

남의 집 프로젝트, 청첩

아주 솔직히 말하면, 몇 주전에 친구가 '문지기'인 남의 집 프로젝트 중에 '청첩'에 갔을 때는 그렇게 큰 감흥이 없었다 (남의 집 프로젝트를 아시는 분들은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문지기인 친구는 야속할 정도로 참석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이랍니다. 선택되기보다 버림받은(?) 횟수가 훨씬 많습니다.^^ 남의 집 프로젝트가 뭔가 싶으신 분들은 링크(클릭) 참조!). 아무래도 원래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생각이 많았고, 브런치에서 그 주제로 1년 반 정도 글을 쓰면서 많이 정리되는 것들도 있었기 때문인지 그 자리에 온 사람들의 고민은 크게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은 비슷한 지점에서 돌고 돈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에서 들었던 말 한두 마디가 꽂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 추천받았던 책들을 읽고 있다. '며느라기'도 그때 처음 알게 된 책이었다. 이번엔 우치다 타츠루의  '곤란한 결혼'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는데, 그때도 얘기가 나왔던 '결혼생활을 애정과 이해 위에 구축하면 안 됩니다'라는 문구가 책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서 '애정'이란 아마도 좁은 의미의 사랑, 즉 에로스적인 감정이 들어간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되고, 그것이 연애가 아닌 '결혼 생활'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결혼 생활의 기초

그런 감정은 결혼생활을 더 풍요롭게 해 주는, 기초가 형성된 위에 쌓여있어야 하는 것이지 결혼 생활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해하지 말자. 애정이 없어도 된다는 게 아니다. 애정과 감정적인 면이 있어야겠지만, 그게 결혼 생활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것은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지기도 하고, 상대가 하는 행동과 옷차림에 따라서 1시간 전에는 없던 게 1시간 후에는 또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애정 자체를 결혼 생활의 기초로 삼게 되면 그 결혼 생활은 계속해서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오르락내리락 거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감정적인 상태를 결혼 생활의 기초로 삼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때도 조금은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 '이해'에 대한 부분이다. '서로 더 오래 같이 살면 서로가 다 이해하게 되지 않나?'라고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네 부모님을 보고, 70-80이 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자. 과연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으신가? 아니다. 그분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분들은 서로를 이해한다기보다는 각자의 모습을 그냥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것을 본다. 그분들은 그걸 '포기했다'라고 표현하지만.^^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

사실 인간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예를 들자면, 당신은 당신이 왜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 지를 '이해'하고 있나? 왜 특정한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는지는? 우리는, 그냥 그게 좋은 것이 아닌가? 연애 얘기로 가자면 순간 상대에 대해서 본인이 짜증 날 때 본인이 어떤 지점에서 짜증이 나는 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실 상대가 A라는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인해 그 행동이 거슬릴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 않나? 우리는 우리의 그런 감정적인 변화를 항상 '이해'하는가? 우리는 '합리적 이성' 또는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표현에 세뇌되어서 스스로가 굉장히 이성적이고 많은 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사실 이해하기보다는 본인이 자라 온 환경의 영향으로 그냥 특정한 것이 옳다고 '믿어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자신은 이해한다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상대와 연애나 결혼 생활의 기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사실 뭔가를 '이해하려고' 본인이 노력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는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폭력도 그런 폭력이 어디 있나? 그런데 설사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엄청나게 기울인다고 해도 한 인간이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이는 인간은 가만히 있을 때 이성보다 감성의 지배를 받고, 감성은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인정하자. 우리도 우리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왜 상대에게 나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하는가? 단 1분, 1초도 나 자신과 떨어진 적이 없는 나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내가 살아온 시간의 10%도 같이 보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나를 완전히 이해해 줄 수 있겠나?


그렇다.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좌절하진 말자, 사실 우린 뭔가를 이해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고 있지 않나? 우리네 삶에서 우리가 많은 것을 사실은 그냥 받아들이고 살듯이, 결혼 생활 역시 상대의 특정한 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자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애에도, 결혼 생활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게 결국 사랑이 아닐까? 이해되지 않아도, 조금 거슬리고 불편해도 내가 그것을 감수해 줄 수 있는 것. 내 기준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상대의 그러한 면은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 그게 결국 사랑일 것이고, 연애와 결혼 생활의 기초일 것이며, 그래서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도, '상대에게 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거슬리는 면이 존재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http://m.podbbang.com/audiobook/channel?id=177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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