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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on de Cyrene Nov 01. 2019

어쩌면 '사랑'이 필요한 이유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하여

엄청나게 급박한 일이 있는 게 아니면 오전에 1시간 정도 뒷동산에서 걷는다. 걷고, 걷다가 인간은 도대체 왜 사랑을 해야 하는 존재인지, 정말로 사랑이 필요한 존재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연애나 결혼이 아니라 '사랑'이 말이다.


그러다 문득, 인간이 사랑이 필요한 건 어쩌면 내가 사랑을 '받기' 위함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나를 사랑해주기를 원하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기를 원하지만 사실 사랑을 받기만 하다 보면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지면서 같은 수준의 사랑 표현과 배려에는 무감각해지지 않나? 심한 경우에는 그러한 사랑에 익숙해져서 상대를 무시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만약 사랑이 '받는'데 핵심이 있다면, 그러한 사랑에는 끝이 있을 수가 없고 항상 모든 것이 새로워야만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애와 결혼 상대를 놓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상대와의 관계에서 '받기 위한 조건'을 따지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나와 어떤 면에서 비슷해서 나에게 공감을 '해줄지' 나를 편하게 '해줄지' 상대를 옆에 끼고 다닐 때 부끄럽지 않을지, 상대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 연애와 결혼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런 류의 고민을 하는데, 그건 모두 '내가 받을 것'을 기준으로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그 한계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랑을 하고, 주는 것에 대하여

하지만 사랑의 핵심은 어쩌면 우리가 무엇을 '받을지'가 아니라 '줄 수 있는지'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상대에게 주는 것을 상대가 고마워하고, 좋아하면서 받을 수 있고, 상대가 내게 그러하는 것을 나는 고마워하고 수용할 수 있다면 그만한 관계가 또 어디 있겠나? 그리고 내가 '주는 것'에는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주는 것의 기쁨을 느낄 줄 안다면 '주는데 질린다'는 말은 거의 안 하게 되지 않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주기 위해서 줘야만 하는게 아니다. 우린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상대는 우리의 존재로 인해 받은게 있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나?


물론, 그것도 상대와 상황 나름이긴 하다. 상대가 '받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주는데 지치고 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상대가 무엇인가를 받고 고마워할 줄 안다면, 그리고 상대도 주는 것을 즐기고 그 기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는 세상 무엇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사랑과 관련하여 내가 '주는 것' 또는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에 핵심이 있단 생각은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대체 왜 사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들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줄 게 없다면,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아질까? 내 존재의 이유가 있을까? 사람들은 '성취를 하면 존재의 의미와 이유가 해결되잖아!'라고 할지 모르지만 크기와 규모와 무관하게 시상식 후에 나 혼자 있을 때 느껴지는 공험함을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경험해 본 적이 있지 않나?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 중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그건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주는데서 발견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남에게 줄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야'라는 자기 합리화와 함께 말이다.


연애와 결혼에 대한 생각

그렇다면 짝사랑을 하면서 주기만 해도 되는데 왜 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역시 '더 줄 수 있기 위해서'라고 설명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대를 내가 일방적으로 좋아할 때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내가 줄 수 있는 것과 상대와 연인일 때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상대와 부부일 때 내가 줄 수 있는 것에는 분명히 상당한 차이가 있지 않나? 더 주고 싶은데 더 주는 것이 상대를 불편하거나 어색하게 할 것 같을 때, 그 마음을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을 때 고백하는 것이 사랑으로 하는 고백이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는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그런 관계를 왜 형성해야 하는지, 특히 결혼은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건 어쩌면 그런 관계가 아니면 내가 상대에게, 그리고 상대가 나에게 그런 마음을 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르몬 작용'은 어쩌면 상호 간에 신뢰가 형성되기가 힘든 인간들 간의 관계에서 자신의 주위에 둘러싸여 있는 벽을 넘어서는 힘을 주는 요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작용이 없다면 인간은 누군가에게 주는 것도, 누가 주는 것을 상대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받는 것도 불가능한 존재이니까.


그렇다면 결혼은? 자신의 벽을 넘어서긴 했지만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 벽을 완전히 허물 수는 없다 보니 서로에게 벽이 가장 낮은 관계에서도 두 사람은 다툴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벽을 그렇게 내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인간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든 것은 그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힘들게 벽을 내린 사람과의 관계를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의사결정으로 끝낼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아무리 심하게 다퉈도 결국 다시 돌고 돌아도 상대만 한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 상대에게 내가 무엇인가를 주고 싶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결혼하는 게 맞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해야만 우리의 존재 이유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고 상대는 그것을 부담이 아닌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로 인해 이 땅 위에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다면, 그게 내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관계가 반드시 에로스적인 사랑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를 쉽게 신뢰하지 못하는 존재 아닌가? 인간은 어지간하면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무엇인가를 내주지 못한다. 그런데 호르몬 작용은 그런 불신 또는 벽을 더 빨리, 많이 무너뜨리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는 듯하다. 그리고 연인이, 부부가 다른 인간관계와 다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한 이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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