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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난 레옹이 Mar 25. 2022

똥강아지 사랑

나의 사랑 나의 할머니

광릉 수목원을 옆에 두고 천천히 굽이도는 착한 신작로,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살구나무랑 밤나무로 버무려진 작은 마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을 모퉁이 빛바랜 초록지붕 한편에 연기가 한 올 한 올 피어납니다. 파란색 대문이 열리고, 고라니처럼 작은 머리에 곱게 쪽을 진 칠순 할머니가 손녀딸을 부릅니다. “똥강아지, 밥묵어야제~.” 내 오랜 기억 속, 밥 짓는 냄새 구수한 어느 어스름 저녁녘 풍경입니다. 나에게 유난히 기억나는 어린 시절이 있다는 건 살아가면서 받게 되는 몇 안 되는 보너스로 대부분이 나의 할머니와 보낸 유년기의 나날입니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보기 힘든 풍경이 됐지만, 어느 시골집 지붕에서 연기 비슷한 거라도 피어오르면 내 마음은 두둥실 할머니 집으로 달려갑니다. 지금은 할머니도 할머니 집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그 시골집으로 말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방방곡곡이 온통 초록으로 물들었습니다. 인류에 의해 파괴된 지구 생태를 보호하자는 전 세계적 대의에 이제 우리나라도 본격적으로 동참하나 봅니다. 외형적으로만 따지자면, 마치 애초부터 우리가 앞장서서 각종 친환경연대를 결성한 것처럼 가는 곳마다 아주 들썩들썩합니다. 저마다 '에코', '그린', ‘탄소중립’, 혹은 '로하스'를 외칩니다. 그리고 지구의 덮개, 초록을 이야기합니다. 한데 가슴이 공허합니다. 몇 번의 단발성 캠페인과 근사한 친환경 문구들이 매연처럼 찌꺼기를 내뿜습니다. 전술로서의 캠페인, 전략으로서의 친환경이 자욱합니다. 모든 것은 비즈니스 아래 받들어 총합니다.


다시 나의 할머니 집으로 갑니다. 내 생애 최고의 풍요로운 순간은 뭐니 뭐니 해도 할머니가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저녁밥 짓는 시간입니다. 나는 굳이 동구 밖까지 나가서 초록지붕에서 피어나는 몽골몽골 하얀 연기를 바라봅니다. 그 연기 냄새를 맡으며 다시 집으로 걸어오던 꼬부랑길이 요즘 눈물 나게 그립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할머니의 땔감은 조금 남달랐습니다. 하나같이 자디잡니다. 장작이나 큰 나뭇가지 대신 떨어진 나무껍질이나 잔가지를 주워다 땔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대단히 숯이 필요하지 않은 한 결코 나무에 생채기를 주지 않았습니다. 설마 생태보호에 대한 의식이셨겠습니까? 할머니는 그저 그렇게 나무와 더불어 산 겁니다.


어느 해 여름엔가는 할머니의 텃밭이 온통 하얀 꽃으로 물든 적이 있습니다. 고추, 상추, 호박, 오이, 감자 따위의 먹거리 작물로 버글대던 여느 때와 사뭇 다른 풍경이어서인지 지금까지도 나에게 아주 강렬한 파노라마로 남아있지 뭡니까? 하얀 꽃이 다 지자 열매가 맺히고 다시 그 열매가 툭툭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꽃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벌어진 열매 사이로 얼굴을 내민 건 다름 아닌 새하얀 목화솜! 그 해 겨울은 그래서 따뜻했습니다. 태양의 양분을 넣고 할머니의 사랑으로 시침질한 포근한 목화솜이불이 나에게 생긴 겁니다. 설마 친환경을 염두에 두고 한일이셨겠습니까? 할머니는 그저 자연과 의논해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을 손녀딸에게 선물한 겁니다.


'에코 지향적 삶'이니, '녹색 평화'니, '생태적 웰빙'이니, 여하튼 초록이 대세가 된 요즘. 무엇을 하건 환경부터 생각하라는데, 나는 자꾸 환경보다 나의 할머니가 먼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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