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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Pina Aug 02. 2020

촛불 한 번에 재력, 두 번째엔 체력을!

그런 체력도 좋지만요

촛불 한 번에 재력, 두 번째엔 체력을!



 별다를 것은 없었다. 일을 마치고 평소처럼 따릉이로 퇴근을 했다. 다만 생일만큼은 조금 다르게 예쁜 케이크를 사겠다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인스타그램을 뒤진 끝에 여름에 쉽게 볼 수 없는 딸기케이크를 동네 근처 디저트샵에서 샀다. 그렇게 케이크까지 사서 집으로 와서는 조금 지친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고 바로 침대로 직행했다. 이렇게 더운 날 자전거를 탔으니까,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딴에는 잠깐만 눕겠다며 누웠지만 한 번 누운 몸이 그렇게 쉽게 일으켜질 리가… 없었다. 거기서부터 모든 게 잘못되지 않았나 싶다.


 눕고 나니 그날따라 잘 오지도 않던 잠이 왔다. 그땐 유독 잠이 안 왔고 요즘도 잠을 규칙적으로 자지 못해 애를 먹고 있는 상태.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싶어 누운 상태로 밥을 시키고 얼핏 잠이 들었다. 잠이 깬 건 음식이 도착했다는 전화 때문이었다. 한 시간 반 동안 음식이 오지 않았던 거였는데, 평소 같았으면 왜 이렇게 늦울까 열을 올렸을 텐데도 자느라 몰랐던 것. 그렇게 쌀국수를 받아들고는 반쯤 잠이 든 상태로 입으로 떠 넣었지만 역시나 잘 넘어가지 않아 그만두고 다시 자버렸다. 내가 그렇게 많은 음식을 남긴 채 먹기를 중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아무튼 여러모로 특이했던 날이다.



 생일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고, 정오가 다 될 무렵 한껏 부스스한 상태로 잠이 깼더니 눈에 보이는 것들이 엉망이었다. 먹다 만 어제의 저녁은 그대로 테이블에 있고, 바닥엔 벗어둔 옷이 널브러져 있는 데다 펼쳐진 빨래 건조대까지, 내가 어제의 몫으로 미뤄둔 정리할 것들 모두가 자연광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 흐린 오후였던 것도 같은데, 어찌나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던지.


 더 기운이 빠졌던 것은 잠든 사이 날아온 축하인사들에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다음날을 맞았다는 것과, 계획을 착착 세워둔 어제의 저녁이 그렇게 허무하게 날아갔다는 사실이었다. 라자냐를 만들어 오븐에 굽는 사이 빨래도 착착 개고 케이크에 불을 붙여 자축하려던 그 계획들. 겨우 정신을 차려 카톡에 답을 하고, 널브러진 것들을 치우고 울적한 기분이 되어 어제 사온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들숨엔 체력, 날숨엔 루틴을-



 그러니까 생일 당일의 오후, 회의실 테이블에서 팀원들이 켜준 촛불에는 그저 ‘돈이나 많았으면!’ 재력을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두 번째 마주한 촛불엔 얘기가 달라졌다. 난 조금 절실한 마음이 돼서는, 퇴근 후에도 저녁을 제대로 차려먹고 주변도 살피는 체력을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퇴근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바로 눕는 대신 저녁을 직접 해 먹고 바로 설거지도 하고 집안을 살피는 그런 체력. 줄넘기 천 개를 매일 하고, 20킬로쯤은 쉬지 않고 달리는 그런 거 말고. 그날 이후 나는 만으로 한 살을 먹기 전과 크게 다른 사람 말고 ‘조금’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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