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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I SEE YOU 06화

#5 시그널 - 대화와 소통에 집착하는 이유

by 해요



2025년 11월 17일



주희는 말수가 없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건 결코 아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살아온 세월만큼 소통에 대한 갈급함은 어느 누구보다 강하다 볼 수 있었다.


주희가 10살이던 때,

각자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느라 바쁜 가족들 상황은 그 어린 눈에도 선명하게 비쳤지만 대화와 눈 맞춤이 실종된 환경에서 가족애를 느껴볼 기회는 거의 전무했기에 더욱 그랬을지도.


그래서 연인의 조건 일 순위가 단연 '대화'였다. 단순히 말만 많거나 듣기만 하는 사람 말고 진정으로 '소통'이 되는 사람. 정신적으로 통한다는 황홀경에 빠질 수 있다면야 상대의 직업, 집안 배경, 외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주희는 이성교제에 늘 열려 있었지만 먼저 다가가는 법은 없었기에 친구들에 비해 첫 연애가 꽤 늦은 편이었다.

사회 초년병 시절 뭘 해도 자존감 떨어지고 정신없이 바쁘기만 하던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한 남자의 커피 플러팅. 처음엔 수고한다는 차원에서 으레 하는 인사로 받아들였는데 이 남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주희가 답답했는지 이내 DM을 보내왔다.





주희 씨를 만나보고 싶어요




회사에서 30분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적한 갈빗집에서 첫 끼를 나누며 그날로 청춘남녀의 서투른 감정놀음이 시작되었다. 직업 특성상 자주 만날 수 없는 여건과 간질간질한 편지 교환이 연애 초반 불씨를 확 키워 주었다.




나라면 그 악조건 속에서
그런 용기 있는 선택을 못할 것 같은데
당신이라는 여자는 정말 멋진 사람이야!




주희는 자신을 그렇게 바라봐주는 첫 남자친구 동현이 더없이 든든했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하지만 오래 봤다고 해서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잘 안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걸 3년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절절히 깨달았다. 헤어진 지 딱 반년 지났을 뿐인데 동현은 결혼 소식을 전해온 거다.

'나만큼 사랑하는 여자는 일생에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던 사람이 환승연애를 했네...


이별 통보를 하기 얼마 전부터 유독 모진 소리, 외모 공격을 그렇게도 해대더니 내가 정말 미워 보여서 그랬던 거구나...'



이별의 양상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적어도 주희에게는 첫 연애의 끝맛이 시큼털털했다. 강제종료, 강제퇴출을 당한 듯한 찝찝한 느낌.

잔여물이 껴서 삐걱거리다 언제 멈춰도 이상할 게 없는 기계로 일순 전락해 버린 주희는 그해를 어떻게 버터 냈는지 기억조차 없다. 주희는 동현이 제짝을 잘 찾아간 거라 믿고 행복을 축원해주고 싶었지만 마음으로 삭힐 뿐 더는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일삼는 동현에게 차라리 고마웠다.

일고의 미련도 남지 않게 해 줘서-



다들 참 열심히 잘 사네...

나도 좀 적당히 할 것이지, 어째서 이렇게 정신적인 교감에 목말라하는 걸까.



가을이 저물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닥치는 어느 겨울밤.

불현듯 끼쳐온 외로움에 잔잔한 오르골 캐럴을 들으며 주희는 잠을 청했다.













이례적으로 이번 꿈에서는 친절한 내레이션까지 등장한다.





전생 상영관에 오신 주희 님을 환영합니다.
이제부터 궁금해했던 당신의 발자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세속적 영광의 유혹과 배신 편. 배경은 14세기 인도네시아입니다.





현생에서 주희 님은 인간관계에서 깊은 정신적 교감을 추구하며 영적인 세계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전생, 즉 14세기 인도네시아의 한 외딴 불교 사원에서 수행하던 ‘아르야(Arya)’라는 젊은 구도자의 카르마적 발자국입니다. 아르야는 젊은 나이에 이미 뛰어난 명상 능력과 지혜로 스승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목표는 번뇌를 끊고 무상(無常)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곧 세속으로 흘러들어 갔고, 이웃 왕국의 고위 귀족이 찾아와 그에게 막대한 부와 궁중에서의 영광을 약속하며 '왕실의 영적 조언자'가 되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르야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더 큰 권위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다'는 그럴듯한 명분에 결국 굴복하고 사원을 떠납니다. 하지만 궁중의 화려함과 권력 다툼 속에서 그의 수행은 점차 빛을 잃었고, 결국 그는 정쟁의 희생양이 되어 배신감과 깊은 환멸 속에 쫓겨나게 됩니다.


이 경험은 현생에서 세속적인 권위와 물질에 대한 깊은 경계를 만들었지만, 동시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교감을 갈망하게 하는 뿌리 깊은 카르마로 남았습니다.







두 번째 고독과 의심의 그림자 편. 배경은 17세기 유럽입니다.




궁정을 떠난 아르야는 다음 생에서 17세기 중부 유럽의 한 산속에서 은둔자 ‘테오도르(Theodore)’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는 전생의 실패를 교훈 삼아 철저히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의 깊은 합일을 통해 영적 진리를 찾으려 합니다.


테오도르는 수십 년 동안 혹독한 고독 속에서 금욕적인 수행을 이어갔고, 거의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 신비한 지혜를 가진 성자로 주변 마을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정작 테오도르 자신은 깊은 의심과 공허함에 시달립니다.


그는 '과연 이 고독이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끄는 길인가? 내가 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가 단지 고독한 자만심 때문은 아닌가?' 하는 의문에 부딪힙니다. 그는 수행의 한계와 깨달음과의 멀게만 느껴지는 거리감에 막대한 정신적 좌절을 겪습니다. 이 고독한 전생의 경험은 현생에서 타인과의 정신적인 교감을 그토록 절실히 갈망하게 만들었고 인간관계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관심은 전생의 고독에 대한 무의식적인 카르마적 반작용인 것입니다.




세 번째 포기하지 않은 아련한 목표, 현생으로 이어진 구도의 끈 편입니다.



두 번의 큰 좌절(세속적 영광의 유혹과 고독한 수행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아르야)는 결코 구도의 길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쩌면 다음 생에는 이 모든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아련한 희망을 품고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이처럼 '깨달음을 향한 막연한 목표'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붙잡았던 카르마가 현생의 당신에게 이어져, 당신은 사람들 속에서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영적인 세계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부여받았습니다.


현생의 당신이 타인의 정신적 영역에 깊이 관여하고, 세속적인 성공보다 관계의 깊이를 중시하는 것은, 전생의 아르야와 테오도르가 실패했던 '타인과의 진정한 연결과 깨달음의 조화'라는 마지막 숙제를 풀기 위한 카르마적 재시도인 것입니다.



이제 궁금증이 다 해결되셨나요?

다음에 또 다른 상영관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별안간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고 주희의 스위치가 켜졌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장구한 자신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동안 자신이 왜 그토록 사람들과의 진정한 교감에 목말라했는지, 왜 그렇게도 보이지 않는 세계에 심취한 삶을 살았는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주희는 자신이 물려받은 영적 자산의 무게를 느끼는 동시에, 신념에 매몰되어 과오를 저지른 두 번의 앞선 경험을 통해 이제는 치우침을 경계하고 개인의 정신적 방황으로 에너지를 탕진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방향성을 가지고 선하게 사용하고픈 가슴속 열망이 움트기 시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이 이렇게 명쾌하게 단막극으로 연출될 수 있다면...

주희는 실없는 상상에 빙긋이 웃으며 월요일 아침을 힘차게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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