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처음 기획에 발을 들여뒀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았고, 내가 좋아하지도 않았던 장르를 기획해볼까 싶었다. 그것은 마치 엇갈린 수레바퀴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삐그덕 소리만 내며 멈춰버리기 일쑤였다. 초반부만 반짝하고는 후반부를 끌어갈 내용이 딱 클리셰에 갇힌 내용뿐인 것이다. 클리셰를 부수기 위해선 클리셰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에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 클리셰를 사용한 것에 불과했다. 사실, 클리셰라고 한다면 자고로 그 장르의 마니아가 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다룰 수 있다. 클리셰를 사용하여 단지 겉멋만 든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도 못했던 기획안이 수두룩하다.
그래서 결국 다시 회귀했던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집중했다. 진짜 사소한 것부터 차곡차곡 ‘나’라는 사람을 쌓아갔다.
작년 새로 맞춘 나의 동반자 안경... 눈 건강이 다시 좋아져야 한다...!
내가 대학에 다니며 가장 좋아하던 나만의 순간은 오후 3시쯤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는 일이었다. 나른한 오후, 수업 없는 공강에 약간 한적한 공간에서의 쉼이 내게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포인트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렇게 ‘나’라는 사람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좋아하던 영화들도 다시 봤다. 나는 왜 그 영화를 좋아하는가, 왜 좋게 기억하는가, 이 영화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는가를 떠올렸다. 홀로 해왔던 나만의 영화 공부였다. 내가 좋아하는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안다면 나와 취향이 같은 누군가에게는 와 닿는 이야기를 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또 내가 겪었던 경험들도 정리해봤다. 과거의 만난 사람들도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정말 평범한 내가 두려워할 일, 그리고 그것은 시나리오 속 인물에게 위기로 다가올 것이며 사건의 시작이 될 일이었다. 나 자신에게 계속 묻고 있었다. 무엇이 가장 좋은지, 무엇이 가장 두려운지 말이다.
왜 미래의 기획을 하면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았을까? 나만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의 씨를 뿌렸다면 그 열매가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는 믿음, 그리고 지금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과거에 씨를 뿌린 곳을 찾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나’라는 존재가 뿌리내린 어느 순간의 과거 속 경험들이 지금의 내게 좋은 영감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그 믿음을 확고하게 만든 것은 신춘문예 당선작 ‘경희’때문이다.
‘경희’의 시작은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1년 반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2017년, 전공 수업에서 근대 시기를 소재로 한 영화를 기획하라는 과제가 나왔다. 그 당시, 나는 근대 시기 신여성에 대한 딱지본 소설이라고 불리는 근대 소설을 읽었었기에, 같은 조원들에게 신여성을 중심으로 영화를 기획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고 같은 조원이었던 동기 언니가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라는 역사적 사실을 가져왔고, 그 이야기에 살을 붙여 신여성 잡지의 기자가 의복 감상회를 기획하는 내용으로 완성해서 발표를 했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8년, 한 영화제작사의 서포터즈로 활동하던 나는 또 영화 기획안 과제를 받았다. 주어진 키워드 주제 중에서 ‘여자’, ‘밥’을 골라 영화를 기획하던 중에 과거 과제가 떠올랐다. 동기 언니에게 언니가 얘기해줬던 ‘조선 유행 여자 의복 감상회’로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다며 허락을 받고서는 본격적으로 기획안을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획안을 다시 수정하면서 시나리오도 쓰기 시작했다. 내 시나리오에 대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달 만에 기획안, 자료조사부터 시나리오 초고 완성까지 이뤄졌다. (그런 추진력이 다시 등장해야 하는데...ㅎㅎ) 그 영화 제작사의 PD님은 열심히 피드백을 해주셨고, 서포터즈 내에서 진행했던 영화 기획안 피칭 발표도 1위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내 글을 공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았던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해 11월, 신춘문예 공고를 보고 완성된 작품이 있으니 보내보자고 했던 것이 당선작으로 돌아왔다. 그 작품의 시작점을 보면, 예상하지도 못했던 그저 전공 수업 과제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작년 여름, 마스크가 없던 그 때가 그립다.
물론, 과거 과제에 제출했던 내용과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그 시작에는 나조차도 잊고 있던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이 만들어준 기회로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더욱 확신이 찼던 것 같다. 미래는 어떻게 예상할 수조차 없지만 현재는 언젠가 미래에 도움이 되리라, 미래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과거를 뒤져보자는 나만의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그 결과, 수많은 기획안 중 1차로 통과됐던 기획안은 ‘경희’를 쓰기 전에 도전해보고자 했던 과거의 기획안이었다. 그 시나리오가 통과되진 않았지만, 그 시나리오도 내 과거가 되어 언젠가 미래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후 3시에 초콜릿 우유를 마시며 책을 읽는 일, 음악 듣기, 감성적인 영화, 개연성이 확고한 영화, 컷이 박자감 있는 영화, 마음에 와 닿는 대사가 있는 영화, 똑똑한 주인공, 표면적인 이야기 속 숨겨진 메시지가 있는 영화, 편히 누울 수 있는 소파, 목적지를 향해 걷기, 가족들과의 보드게임, 뮤지컬 넘버 듣고 부르기 등등”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역할을 찾지 못하는 일, 낯선 사람들 속에 있는 일, 사람들이 많은 공간(두려워한다기보다 한적한 곳이 더 좋다.), 가족의 죽음, 느려지는 영화, 멍청한 주인공, 답답한 조연, 너무 꼬인 주인공의 삶, 개연성 없는 영화, 뒤처지는 일, 막연한 미래, 불안한 선택지, 근거 없는 조언, 나를 향한 섣부른 판단 등등”
p.s.
오늘도 집에 도착한 신간 도서들을 읽으며 좋은 원작을 찾고 있다. 소설을 읽으니, 소설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소설로 기획하고 있는 소재의 초고를 올해 안에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시나리오 기획안에서 떨어진 오리지널 각본의 소재였다. 소설로라도 완성하고 싶어서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