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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Apr 22. 2020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처음으로 두툼한 시집을 선물 받았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시가 갑자기 나에게로 왔던 때. 어렵기만 하던 시를 이제 막 읽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얇은 시집의 무게도 감당이 안되던 나는 이 붉은 표지의 두터운 시집을 보고 겁이 덜컥 났었다. 그렇대도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제목이 한없이 좋았다.


내가 읽던 그 시집을 보고 함께 좋아해 주던 이가 있었다. H는 나와 동갑이었다. 나와 비슷한 감성과 취향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H는 문학과 시를 사랑했고 어쩌면 나보다 더 이 시집을 좋아하고 잘 이해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 시집이 더 좋아졌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H에게 같은 시집을 선물했다.


몇 년 전 H는 돌연 연락을 닫아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H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고 나도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느끼던 계절의 변화마다 H가 문득 떠오를 때면 잠깐씩 궁금했다. H와 나는 김윤아의 노래 '봄이 오면'을 유독 좋아했다. 김윤아의 노래를 들으며 봄이 오고 봄날이 갔고, 또 야상곡을 들으며 애달파하던 때도 있었다. 내가 팟캐스트 방송을 할 때 H를 떠올리며 아껴서 그 노래들을 넣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마 H는 내가 그런 방송을 시작한 줄도 모르리라.




더운 봄바람이 부는 어느 밤에 우연히 H의 프로필을 보았다. 작은 책꽂이에 있는 몇 권의 책들 사이에 빛바랜 시집이 꽂혀 있었다. 빨간 표지는 책 등 부분만 빛이 바래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선물한 그 시집이다. 아직도 머리맡에 두고 사랑할 수 있는 책을 선물한 나를 칭찬하고 싶었다. 불쑥 알은체를 하고 싶기도 했고 혹시 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마흔 즈음을 지나면서 함께 아파했던 우리는 곧 쉰 즈음이 된다. 선이 굵은 호감형 이목구비를 갖고 있으며 딸의 이야기는 자주 하지만 남편의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은 H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하지만 하지 않은 말들이 남아 있어 더 오래 기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이토록 따뜻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오랜만에 책장에서 시집을 꺼냈다. H는 지금 어떤 시를 읽고 있을까. 잠시라도 우리 함께 걸었다는 것을 나만 기억한대도, 이미 나를 잊어버렸다고 해도 나는 괜찮다. 덧없는 길을 함께 걸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으니.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우리 함께 걷고 있다


오늘도 길을 걷는 우리는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와서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힘든 발자국들은
한 줌 먼지처럼 바람에 흩어지니
그러나 염려하지 마라

그 덧없는 길을
지금 우리 함께 걷고 있으니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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