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를 삶아 열무 비빔국수를 할 참이었다. 몇 달 전에 반절 먹고 보관해둔 국수를 꺼냈다. 어머님 댁에 선물로 들어온 '중면'이었다. 예전엔 국수도 귀한 선물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이 중면은 지역 이름을 달고 있다. 슈퍼에 흔한 비닐 포장이 아니라 종이로 국수를 한번 말고 얇은 비닐로 감싸져 있었다. 종이 포장지에는 생산자의 이름과 사진까지 있는 걸로 보아 더 믿음이 가는 국수였다.
우리 집은 국수를 자주 먹지 않는다. 그건 전적으로 나의 영향일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국수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없다. 그래서인지 국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결혼해서 시아버님으로 인해 놀랐던 일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혼자서도 국수를 잘 삶아 드신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시아버님은 국수를 좋아하셨고 남편도 다르지 않다.다만 다른 점은 내가 삶아주어야 한다는 것.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부어 끓였다. 엄마는 국수 삶을 때 물이 넉넉해야 된다고 했다. 끓는 물에 국수를 넣고 국수가 끓어오르면 찬물을 부어 다시 끓이는 것을 세 번 하라고 일렀다. 끓어오르면 찬물 한 컵 붓고 다시 끓어오르면 찬물 한 컵 붓기를 세 번. 그래야 국수가 탄력 있게 삶아진다고 했다.
어릴 적에 국수 먹은 기억은 안 나는데 엄마가 국수 삶던 기억은 난다. 끓고 있는 국수를 한가닥 건져내어 찬물에 휘휘 흔들어 입으로 쏙 빨아들이던. 엄마는 국수를 좋아했지만 아빠가 싫어해서 밥상에 국수를 자주 올리지 않았을것이다. 아빠는 수제비고 국수고 밀가루 음식이 지겹다고 했다.
물이 끓어올라 오른손으로 국수를 한 줌 집어 물에 펼쳐 넣으려는 찰나. 남은 국수를 잡고 있던 왼손 아래로 국수가 우수수 떨어졌다. 이럴 수가. 국수를 말고 있던 종이 포장지만 내 손에 남고 국수는 모두 아래 구멍을 통해 바닥으로 쏟아진 것이다. 순식간에 온 바닥으로 국수가 흩어졌다. 종이로 싼 국수라는 생각을 깜박한 순간이었다.
상황에 아연하기도 잠시, 오른손에 쥐었던 국수를 내려놓고 까치발로 쏟아진 국수를 비켜 넘어갔다. 싱크대에서 먼 곳부터 국수를 하나하나 모아 손에 쥐었다. 소면보다 굵은 중면이었기에 집을 때는 수월했지만 손에 쥐면서 자칫하면 국수가 부러졌다. 익으면 그렇게도 부드럽게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국수의 태생은 이렇듯 곧고 부러지기 쉬운 것이었다. 부러져 놓칠세라 살살 모아들고 일어섰다. 아직 끓고 있던 물에 국수를 한 움큼씩 펼쳐 넣었다.
큰 이모 댁에 외가 식구들이 많이 모였던 날이다. 내가 큰 이모라고 불렀던 이모 댁에 큰 외삼촌이 오셨다. 엄마는 여덟 남매 중에서 넷째였고 큰 딸이었다. 큰 외삼촌은 지방에 사시기도 했고 거동도 편치 않아 서울 나들이를 자주 하지 않으셨다. 모처럼 서울에 일을 보러 오셨다가 갑작스레 큰 이모 댁에 들른 것이다. 서울 사는 나머지 형제들은 큰 외삼촌을 뵈려고 자식들까지 대동하여 큰 이모의 작은 아파트에 모였다. 방과 거실까지 사람들이 그득했다.
우리 집도 큰 이모 댁에서 멀지 않았으나 우리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그나마 번듯하던 작은 아파트를 팔고 더 작은 전셋집에 살고 있었다. 엄마는 모처럼 서울에 오신 큰 외삼촌을 우리 집에 모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가 나를 임신하여 만삭이었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니 그 이후로 엄마나 엄마의 형제들에게는 큰 외삼촌이 부모나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큰 외삼촌네는 얼른 한 끼 드시고 집으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했다. 급하게 모신 탓에 음식 장만을 따로 하지 못한 이모들은 총출동한 대식구에게 빠르고 손쉬운 국수를 대접하기로 했다. 비좁은 부엌에 이모들과 외숙모들이 분주했다.
큰 들통에 물을 끓여 한 바구니 삶아서 건져내고 또 삶기를 몇 번. 나는 그릇에 담긴 국수를 서빙하느라 부지런히 주방과 방을 왔다 갔다 하며 그분들의 모습을 보았다. 외숙모들과 이모들은 국수를 삶을 때 찬물을 세 번 넣을지 두 번 넣을지 의견이 분분했다. 세 번 넣으면 너무 분다고, 아니 두 번 넣으면 국수가 덜 익는다고.서로 자신이 옳다며 옥신각신하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정겨워 보였다.
끓어오르는 국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그날이 기억났다. 큰 이모 댁에서의 그날은 둘째 외삼촌의 집들이로 엄마의 형제들이 모두 모인 날보다 훨씬 따뜻하게 남아 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이 아니라도, 넓고 편안한 집이 아니어도, 부모님 대신으로 생각하던 큰 외삼촌을 위해 맛있는 국수 한 그릇을 대접하려고 들뜬 얼굴을 했던 이모가, 엄마가 떠올랐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서 십분 거리인 시부모님 댁으로 가기로 했다.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어느덧 칠 년이 넘었고, 넘어간다. 이제는 어버이날이 와도 어느 정도는 무덤덤하게 보내게 되었다. 시부모님 댁에 갈 때면 나는 이제 갈 곳이 없구나, 불쑥 슬퍼지기도 하지만.
엄마네 여덟 남매 중 엄마를 제외한 형제들은 모두 건강하게 살고 계신다. 그들 중 누가 그날의 국수 삶기를 기억할까? 아마 모를 것이다. 엄마가 부모님께 손수 한 끼 식사를 대접하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오늘은 엄마가 삶은 것만큼 국수가 잘 삶아졌다. 새콤한 열무김치를 넣고 참기름과 깨소금과 설탕 약간. 손으로 슬슬 무쳐서 그릇에 담는다. 엄마에게 대접하지 못한 국수 한 그릇을 아이들과 맛있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