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쓰던 김치냉장고는 지금 내 주방에 있다. 냉장고 앞쪽은 흰 바탕에 분홍색 꽃 이파리가 하늘하늘 그려져 있고 좌우 양쪽으로 나뉜 칸의 문은 위로 열린다. 지금은 위로 긴 김치냉장고도 있지만 처음 김치냉장고가 나온 뒤 한참 동안 이런 모델이 나왔고 갈수록 큰 용량의 신제품이 출시되었다. 엄마는 당시 나오던 김치냉장고 중에서 가장 큰 걸 골랐다. 큰 냉장고가 아쉬웠던 엄마의 한풀이였다.
엄마 부엌에 있던 냉장고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망가졌다. 엄마가 쓰던 냉장고는 문이 위아래로 달려있고 위에는 냉동실 아래는 냉장실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당시에 유행하던 양문형 냉장고를 권했다. 엄마는 몇 날을 고민했다. 이게 내 마지막 냉장고가 될 거라며. 엄마가 건강할 때였으므로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펄쩍 뛰었지만 엄마는 냉장고 한 대 사면 몇십 년은 쓰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그러니 더욱 크고 좋은 걸 사라고 했다. 생각 끝에 엄마는 그냥 쓰던 대로 위아래 문이 달린 냉장고를 사겠다고 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작은 집에 너무 큰 냉장고는 부담스럽다고. 게다가 쓰던 냉장고와 같은 스타일이 편하고 더 효율적이라고. 양문형 냉장고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했다. 묘하게 설득력 있었다. 나는 새로 나왔거나 유행한다는 이유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엄마 부엌에 놓을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냉장고로 타협했다.
후에 김치냉장고를 바꿀 때 엄마는 냉장고에 대한 한을 풀 듯 나와 있는 모델 중에 가장 큰 걸 골랐다. 다행히 김치냉장고를 놓을 공간은 베란다에 충분했다. 밝은 회색빛깔에 예쁜 분홍 꽃무늬로. 먹지 않아도 배부를 김치통이 그득한 김치냉장고는 엄마의 뿌듯함이 되었다.
오빠는 엄마의 김치냉장고를 내게 가져가라고 했다. 오빠에게는 너무 큰 물건이라고. 우리집은 한창 어린아이들 물건이 넘치고 있을 때라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냥 버리긴 아깝고. 시어머님께 여쭸더니 가져오라고 하셨다. 이미 크고 작은 김치냉장고가 두 대 있었지만 한 대 더 놓을 공간이 있었다. 커다란 김치냉장고를 차에 실어 가져왔다. 어머님은 잘 보관해 둘 테니 언제든 찾아가라고 하셨다. 나는 필요 없다고 그냥 어머님 쓰시라고 했다.
냉장고는 있으면 채워지는 법. 어머님의 세 번째 김치냉장고가 되어 다시 큰 용량을 자랑하며 몇 년간 아낌없이 사용되었다. 시댁이 있는 건물이 재개발되며 이사를 하기까지는. 새로 이사하는 집은 좁아서 짐 대부분을 버려야 했다. 어머님은 엄마가 쓰던 냉장고는 맘대로 버리기 뭣하다며 가져가는 게 어떠냐고 했다. 버릴지 쓸지 다시 고민. 가져오면 어디에 놓아야 할지 답이 없었다. 나는 창고처럼 쓰던 방의 짐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엄마의 집을 떠난 꽃무늬 김치냉장고는 버려질 위기를 몇 번 넘기고야 우리집에 입성했다.
나는 김치를 담그지 않는다. 이제는 시어머님의 김치를 때마다 가져다 먹는다. 기껏해야 김치 한두 통뿐이라 처음엔 텅 비어있었지만 김치냉장고에는 김치 말고도 넣을 게 많았다. 쌀, 물, 과일, 맥주 등등. 이젠 이 커다란 김치냉장고 없을 때 어찌 살았나 싶다. 요즘은 일반 냉장고처럼 세워두는 김치냉장고도 많지만 나는 엄마의 김치냉장고가 좋다. 엄마 말대로 그런 모양은 많이 들어가지도 않는다. 일주일에 한 번 장을 잔뜩 봐오는 날이면 냉장고가 비좁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모두 김치냉장고에 쓸어 넣는다. 엄마처럼 넉넉한 김치냉장고, 엄마가 욕심내 산 커다란 김치냉장고. 이제 나에게 와서 잘 쓰이고 있다는 걸 알면 엄마도 기뻐하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