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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번째 삶 Dec 29. 2019

일촌과 이촌의 거리

조카의 백일

조카가 어느새 백일이다. 

집에서 간단히 백일상을 차렸다기에 다녀왔다.
태어났을 때 병원 가서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이후 조카를 처음 마주한다.


동생이 간간이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주었지만 실제로 보고 안아주는 것은 처음이다.
오랜만에 보는 꼬물이라지만 조카인데도 낯선 것이 사실이다.


아기를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도 잊어버려서 딴에는 살살 안아야 한다는 생각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게다가 기력은 벌써 딸리는지 금방 팔이 아파와 오래 안아주지도 못했다.
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이미 오래된 사진같이 색이 바랬다.



백일 된 아기를 안아서 흔들고 어르고 하는데 내 모습에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보였다.

엄마가 내 아이들을 돌봐주실 때 어른들은 왜 아기를 안고 저런 소리를 낼까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기를 안고 엄마가 내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옹알이하는 아기에게 답해주고, 눈 맞추고 웃어주고.
이모로서 했지만 그런 내 낯선 모습에서 내 엄마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어쩌면 엄마가 내 손을 빌어 손녀를 안아준 것일까. 안아보지도 못한 손녀에 대한 아쉬움으로. 동생과 아기에게 미안한 마음이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나.


가까이 살았으면 가끔 가서 봐줄 수 있었겠지 싶을 때면 더 아쉽다. 내가 아이들 육아로 허덕일 때 동생은 자주 와서 아이들을 봐줬다. 이젠 엄마도 안 계신데 나라도 자주 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잠깐 안아주고도 이렇게 팔이 아픈데, 종일 봐야 하는 동생의 수고로움을 눈으로 보 미안함이 배가 된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다가 한번 안아주고 집으로 돌아오니 꼬물이 조카 생각이 자꾸 난다. 어른들이 아기를 보고 가면 왜 그렇게 더 안달하는지 알 것 같다. 자주 못 봐 낯설었는데도, 꼬물대던 손발과 눈 맞추고 웃던 모습이 머릿속에 자꾸 출몰한다. 그런데도 한 번 가야지 맘먹기는 어렵다.


아쉬운 마음이 크고 보고 싶은 마음이 깊으면 물리적 거리는 문제 되지 않을 것이다. 거리가 멀다고, 일이 바쁘다고 죄책감에 자꾸만 핑계를 갖다 붙인다. 


마음만 먹으면, 왕복 네 시간 전철을 탈 각오만 있으면 가능한데. 내 게으름을 조금만 조절하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리인데. 동생은 조카들 본다고 매주 왔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미안함은 그저 미안함일 뿐이니까.


엄마가 계셨더라면 멀어도 한달음에 가셨을 텐데. 엄마 집에서 우리 집도 두 시간 거리였지만 마다하지 않고 애들 보러 자주 오셨었다. 지금 동생집도 엄마는 멀다 않고 자주 아기를 보러 다니셨으리라. 게다가 처음 얻는 손녀이니. 




나는 엄마가 아니고 언니라서 일까. 내가 무덤덤한 언니이기 때문일까. 만일 내 딸이었다면 다를까. 동생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줘야 할 것 같은 부채감이 나를 더 미안하게 했다. 엄마와 나는 뭐가 다를까. 왜 그리 어려울까. 굳이 따지자면 일촌과 이촌의 차이. 그런 말로라도 무심한 마음에 변명하고 싶다.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울타리 안에 있는 듯 해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일촌과 이촌의 거리가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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