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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30. 2022

사랑한다는 흔한 말

가족환상곡 *7

사랑한다는 말이 이리도 어려운 말인 줄 미처 몰랐다.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반면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가벼운 인사말처럼 입에서 쉽게 나왔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뭐가 그렇게 낯간지럽고 민망하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속으로만 삼키는 걸까. 누가 보면 함부로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금기어인 줄 알겠다.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망각하게 된다. 내가 그랬다. '이해해 주겠지' '괜찮겠지'라는 잘못된 믿음 아래 아니, 아예 자각하지도 않고 모진 말을 수없이 쏟아냈다. 사랑한다는 말은커녕 부모님 마음에 생채기를 남기는 불효를 곧잘 저질렀다. 짧은 인생에서 사랑한다는 말만 해도 모자랄 판에 상처 주는 꼴이라니. 평생 내 곁에서 내 편이 돼 줄 것만 같던 부모님도 결국에는 나를 떠나간다. 당연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그 사실을 잊고 산다, 마치 영원히 함께 할 것처럼. 부모님의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저 오글거린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지독하게 잔인하다.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루다가 어느 순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단어가 될 수 있다.


나는 모순적인 인간이었다. 부모님에게는 오글거린다며 난색을 표하던 그 말을 남자 친구에겐 밥 먹듯이 했다. 누구랄 것 없이 친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애정 표현을 주고받는 대상에 부모님만이 예외였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사실은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인데. 어리석게도 굳이 말해야 아나.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했다. 


어린 시절 아빠와 찍은 사진을 보면 내 얼굴은 하나같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빠가 나를 안아준다든지 내 볼에 뽀뽀한다든지 스킨십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유독 더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구박 받고 자란 줄 오해하겠다. 보통 어릴 땐 아빠 엄마에게 막 안기고 뽀뽀하고 그러지 않나. 심지어 아빠는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데도 왜 그렇게 질색팔색 하며 거부를 한 건지. 별스럽기도 하다. 어린 딸에게 상처 받았을 그때의 아빠 마음을 뒤늦게나마 이제야 헤아려 본다. 아빠에게 나는 예나 지금이나 사랑스럽고 애틋한 존재다. 아마 내 나이가 환갑이 돼도 그럴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 아빠에게 잘해야지 마음 먹다가도 뒤돌아서면 까먹기를 반복한다. 나는 책임감이 강하고, 무뚝뚝한 전형적인 장남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요즘 흔히 말하는 K 장녀는 아니다. 지금이야 실없는 농담도 하고 잔소리도 부쩍 늘었지만, 이전에는 필요한 말만 딱 하고 살 정도로 입을 꾹 닫고 살았다. 친구나 애인한테 하는 거 반의 반만이라도 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엄마는 그때 내가 입에 본드를 붙인 줄 알았다며 킥킥거렸다.


묵묵히 챙겨주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정 표현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달라져서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오죽하면 엄마는 만나는 친척마다 “얘 성격 많이 좋아졌다”라며 동네방네 광고를 하고 다녔다. 그 정도로 과거의 나는 뻣뻣함이 나무토막 저리 가라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사랑하고 존경한다 한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나도 말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당장 어렵다면 문자로 혹은 편지로 먼저 마음을 전해 보는 건 어떨까. 모든 일에 때가 있다는 말처럼 효도야말로 때가 있다. 늦었다고 느꼈을 때는 정말 늦은 거다.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는 이들을 나는 많이 보았다.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더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밥 먹고, 대화하고, 여행하고, 사랑한다 말해줄 걸 그랬다고. 그러지 못한 게 너무 죄송하고 후회스럽다고. 영원한 이별은 우리에게 만회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아직 기회가 남아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그 순간이 아닐까 싶다. 사랑한다고 말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더 늦기 전에 아니, 지금 당장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보자. 하루하루 미루다 때를 놓치면 그때는 영원히 후회할지도 모른다. 처음은 서먹하고 데면데면해도, 말 그대로 처음이 어렵지 일단 한번 말해 보면 사랑한다는 말만큼 하기 쉬운 말도 없다. 


조금 전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하트 이모티콘을 덧붙여 보냈다. 곧이어 답장이 왔다.

「나도 사랑한다. 우리 딸♡♡♡」

예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이다. 부모님에 국한되어 사랑한다는 단어만으로 심한 알레르기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던 나였다. 아빠도 나와 비슷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누구나 처음은 어렵다. 나도 그랬고, 아빠는 더더욱 그랬다.


세상의 어떤 말보다 힘이 센 

세상의 어떤 말보다 따뜻한

세상의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되는  

들으면 들을수록 살고 싶어지는 그 말.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 부디 용기 내어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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