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금이 겨울방학을 맞아 해외여행을 계획 중인 것 같았다. 우린 1년에 한 번씩은 해외여행을 갔었다. 코로나로 인해 최근 3년 간 해외여행을 못 갔으니, 그도 나처럼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그의 연락을 받고 3년 동안 쓴 적이 없는 여권을 찾아본다.
평소 정리 강박이 있는 나는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를 다 꿰고 있다. 그에 반해 전남편은 마지막으로 물건을 사용한 장소가 그 물건이 놓일 장소가 된다. 그럼 내가 물건을 다시 원래 위치에 가져다 두고, 남편은 또다시 물건을 찾고 나는 물건을 찾아주고 이런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우린 이런 류의 대화를 참 많이 했었다.
"수연아, 손톱깎이 어디 있어?"
"거실 서랍장 왼쪽에서 첫 번째 칸에 봐봐."
"없는데?"
"아, 진짜~ 여기 있잖아."
"왜 꼭 내가 찾을 땐 안 보이지? 진짜 이상하네."
잠시 옛날 생각을 하다가 다시 여권에 집중한다. 내 뇌피셜로 여권이 있을 만한 곳은 두 군데로 압축된다. 화장대 서랍 속 분홍색 상자 아니면 여행용 캐리어. 먼저 화장대 서랍 속 분홍색 상자를 열어본다. 이것은 우리가 추억 상자라고 불렀던 것으로 편지, 스티커 사진, 폴라로이드 사진 등이 들어있다. 이 상자를 열어 여권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딱딱한 초록색 표지가 보여서 꺼내보니 구멍이 뚫려있다. 그와 나의 만료된 여권 두 개가 나왔다. 수색 실패다.
두 번째 후보지인 여행용 캐리어가 있는 방으로 옮기려는데, 상자 속 편지들이 내 눈길을 끈다. 왠지 읽으면 안 될 것 같은데 호기심이 그 마음을 이겨버렸다. 이 참에 편지를 읽고 싹 비워버리기로 마음먹고 손에 잡히는 대로 편지를 하나 둘 꺼내 읽어본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왜 초콜릿을 선물할까? 내 생각엔 사랑의 맛도 달콤 쌉싸름해서 일 것 같아. 내가 난생처음으로 만든 초콜릿이야. 자기가 좋아했으면 좋겠다.'
- 2012년, 밸런타인데이에 내가 쓴 편지였다.
'자기 나한테 서운한 거 있으면 필리핀에 두고 오고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재미있게 잘 놀다 와.'
- 2013년, 친구랑 보라카이로 여행 가는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주면서 내 캐리어에 그가 몰래 넣어둔 손편지였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면서도 가장 힘든 시절을 겪고 있는 것 같아. 그래도 자기가 있어서 큰 힘이 돼. 고마워.'
- 2015년, 산후우울증으로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내가 출근하는 남편의 옷 호주머니에 슬쩍 넣어둔 쪽지였다.
'지금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자기는 권태기가 온 것 같은데 난 잘 모르겠어. 난 자기를 한결 같이 좋아해서 그런 건가.'
- 2016년, 대화도 잘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더 우선시하는 것 같은 그에게 투정을 부렸다. 그날 저녁 그가 노란 장미꽃 한 송이와 노란색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줬던 기억이 난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만 상자를 덮어버렸다. 그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넌 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고, 난 너에게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그렇게 다정했던 넌 어떻게 나를 두고 바람까지 피우게 된 걸까.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우린 어쩌다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을까.
나는 다시 여권을 찾는다는 목적 달성만에 집중하기로 한다. 팬트리에 가서 여행용 캐리어 두 개를 꺼낸다. 작은 캐리어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큰 캐리어를 열자 작은 여행용 수납 지퍼백이 나왔다. 여기다!! 역시 내 예상대로 여권 세 개가 포개져 있었다. 그와 나의 여권을 펼쳐보았다. 같은 지면에 찍힌 같은 날짜의 같은 출입국 도장. 그리고 이젠 서로 다른 도장으로만 채워질, 남아있는 수많은 지면들.
이 순간 나는 이혼이 아닌 이별이 실감 났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나는 이혼이라는 법적 절차와 현실적인 문제에 치여 이별의 슬픔은 미뤄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권을 찾으면서 이혼은 이별이 되어 나타났다. 양육비를 책정하고 구청에 서류를 제출하고 재산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 가장 가까웠던 사람과 가장 멀어지는 것, 절친 한 명을 잃는 것, 함께 써 내려가던 추억에 마침표를 찍는 것.
슬펐다. 그가 그리워서도 아니고 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어서도 아니다. '기억하는 모든 것이 덧없고, 기억되는 모든 것이 덧없다.(명상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이 진리인 것 같아서 슬펐다. 그러나 차마 버리지 못한 편지와 나란히 놓여있는 여권 두 개를 떠올리니 모든 기억이 덧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사랑은 사라지고 우리는 변했지만 추억만은 그대로이니까. 시간이라는 필터를 거쳐 숙성된 기억인 추억은 아픔만을 주진 않으니까. 다시 봐도 들춰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주니까.
"좋은 꿈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 회수할 수 있는 꿈 값이 있을 것. 즉 감정이 다양하게 나타날 것! 둘째, 다시 봐도 좋은 영화처럼 다시 꿔도 의미가 있을 것! 셋째, 꿈꾸는 사람 개개인을 위한 맞춤 형태일 것! 이 모든 걸 완벽하게 만족하는 단 하나의 꿈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추억이에요, 추억." -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안녕. 나를 행복하게도 하고 아프게도 했던 당신. 그래도 내 인생에 나타나줘서 고마웠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랄게. 그리고 부디 오늘만큼은 좋은 꿈 꾸길.
쌍둥이처럼 꼭 닮아있던 우리의 여권, 그리고 추억.
안녕하세요? 브런치 작가 장수연입니다. 저의 결혼 독립, 즉 이혼 글은 여기서 마무리할게요. 그동안 많이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끔 구독자님 중 제게 메일을 보내셔서 멘탈 관리 어떻게 하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그렇게 멘탈이 강하진 않아요. 쿠크다스까지는 아니고 유리 멘탈 정도...? ㅎㅎ (강화유리 되려고 노력하는 중) 그래도 제가 깨달은 사실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흔들리며 살아가기 때문에 제가 많이 흔들릴 땐 제 옆에 있는 조금 덜 흔들리는 사람에게 기대면 된다는 것입니다.
또, 제가 평소에 베푼 작은 친절이 돌고 돌아 저를 구원해주기도 하더라고요. 하루는 정말 외롭고 괴로웠어요. '내가 모든 것을 망쳤구나. 나 정말 왜 사는 걸까.'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작년 저희반 학생이 보낸 카톡이 왔어요.
'선생님! 제가 목표하던 대학 합격했어요! 작년에 선생님이 "너희들 손으로 바꾸어 갈 미래가 선생님은 너무 기대돼"라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어요. 그때 그 말을 듣고 문득 저도 제 미래가 너무 기대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어요. 그때부터 저는 좌절보다는 뭐든 해보자, 난 무언가 대단한 걸 해낼 사람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달려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제는 저도 제가 어떤 일을 해낼지 기대하면서 더 열심히 저를 위한 시간을 쏟아내 보려고 해요.'
작년에 학생의 날을 맞이하여 아이들에게 핸드크림을 선물하면서 제가 했던 말이었어요. 우리의 미래는 너희들의 손에 달려 있으니, 손 관리 잘하라고. ㅎㅎ 그런데 이 카톡을 읽는 순간 제 미래도 저한테 달려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지금까지 실수도 많이 했지만 앞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해낼지가 기대되더라고요. 지금부터 잘하면 된다고 다시 한번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결국 제가 했던 응원의 말을 제가 돌려받은 셈이네요. ^^;
어쩌면 브런치에 이렇게 저의 아픈 이야기를 털어놓고 제 소중한 시간을 막 투자해서 글을 쓰는 것도 제가 구독자님들께 베풀 수 있는 작은 친절인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느린 작가라서 글 한 편을 쓰는데 7~8시간 정도 걸리는 것 같아요(글감을 떠올리는 시간까지 합하면 10시간 정도... 아직 아기 작가라 그런 듯해요ㅜ). 그래도 제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뻐서, 필요없는 말로 독자님의 시간을 1초 라도 뺏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듬고 또 다듬는답니다.
저의 이혼 공감 에세이는 여기서 마치지만 또 다른 재밌고 위로가 되는 글로 찾아뵐게요. 저의 작은 친절을 라이킷과 따뜻한 댓글로 되돌려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미 글값 회수는 완료한 기분입니다!! ㅎㅎ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