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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Nov 23. 2022

이혼 아웃팅 당한 날

선량한 오지라퍼들이 사는 세계로의 초대

*아웃팅이란?

자신의 사회적 신분(social status) 또는 성향이 타인에 의해 강제적으로 폭로되는 일을 이른다. (중략) 커밍아웃의 반대말 격. (출처 : 아웃팅 - 나무위키 (namu.wiki) )




  "수연아, 이번 주엔 꼭 밥 한 번 먹자."

  "네, 언니. 알겠어요. 수요일 어때요?"


  '밥 한 번 먹자'는 수림 언니와의 약속을 미루고 미루었다. 더 이상 거절했다가는 우리 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엔 승낙했다. 수림 언니와의 약속을 계속 미룬 이유는 언니가 내 이혼에 대해 물어볼 것 같아서였다. 수림 언니의 딸인 다윤이는 종종 우리 집에 와서 내딸 금이와 함께 논다. 어느 날 늦은 저녁, 다윤이를 데리러 온 언니의 시선이 우리 집 벽에 걸려 있는 그림에 머물렀다. 그곳은 원래 내 웨딩 사진이 걸려있던 자리였다.


  "요즘 금이 아빠가 많이 늦나 봐?"


  그림에 머물던 언니의 시선이 현관에 놓인 전남편의 구두로 향하며 말했다. 여자 둘이 사는 집인 걸 틀키기 싫어서 내가 일부러 남겨둔 것이었다. 주말에 같이 놀러 가자고 언니가 제안했다. 그 주에는 금이와 금이 아빠의 면접교섭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금이가 아빠랑 둘이서 여행을 간다고 둘러댔다. 수림 언니는 사이좋은 부녀라며 칭찬했지만, 언니의 눈빛은 '난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수림 언니는 장점과 단점이 동일한 사람이다. 그것은 바로 오지랖이다. 언니의 오지랖은 무지 넓어서, 영어 교사인 나에게 자녀 영어 교육 방법에 대한 설교를 할 정도이다. 언니는 월 200만 원을 사교육비로 지출할 정도로 사교육에 관심이 엄청나다. 자기가 힘들게 알게 된 학원 정보나 교육 관련 정보를 흔쾌히 주위에 알려주는 착한 오지라퍼이기도 하다. 물론 사교육에 큰 관심이 없는 나에게는 대부분 무용한 정보이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언니와 친해지게 된 계기가 '나'의 오지랖이었다는 것이다. 2년 전 어느 날, 아파트 놀이터에서 수림 언니와 다윤이를 처음 만났다. 다윤이와 금이는 비슷한 점(같은 나이, 외동딸, 또래보다 큰 키, 외향적 성격)이 많았고, 처음 만난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즐겁게 어울려 놀았다. 해가 지고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르는 사람의 번호를 땄다. 그게 언니와 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인연을 이어나가기 위해, 나는 내키지 않는 점심을 언니와 함께 먹어야만 했던 것이다.


  식당에서 만난 언니는 내 예상과 달리 스몰 토크만 잔뜩 했다. 언니의 고등학교, 대학교, 편입 얘기까지 들었던 것 같다. 최근 <돌싱글즈>를 재밌게 보고 있다는 얘기에 약간 뜨끔했지만, (왠지 불법 느낌이 나는) 무료 OTT 사이트를 추천해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나는 속으로 '괜히 내가 제 발 저렸나'하고 조금 안심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서 차를 주문하려던 순간이었다.


  "요즘 남편이랑 사이 어때?"


  쿵.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솔직히 다 말할까? 혹시나 우리 금이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가면 어쩌지? 별거 중이라고만 얘기할까?'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 결국엔 들킬 것 같아서, 내가 말할 수 있는 일부의 진실만을 얘기하기로 했다.


  "저희 사이 별로 안 좋아요, 언니."


  나는 어떻게 해서 다른 화제로 넘어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우리만큼 안 좋을까? 사실 우리는 이혼 접수하고 지금 숙려 기간이야."


  헉. 허거거거거걱. 전혀 예상치 못한 언니의 말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그간 서로 눈치만 보느라 하지 못했던 이혼 이야기를 실컷 했다. 내 예상대로 언니는 내 이혼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고, '우리'의 이혼에 대해 '함께' 얘기할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


  언니와 나의 이혼 과정에는 비슷한 점이 있었다. 삐걱삐걱하며 그럭저럭 굴러가던 결혼 생활 중, 고통의 한계점이 왔다. 언니에게 있어서는 언니가 큰 수술을 마친 날 남편에게 막말을 들은 것이었고, 나에게는 금이 아빠의 외도였다. 그 순간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혼을 결정했다. 우리 둘 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죽겠구나' 싶어 결혼에서 탈출했고, 우리의 선택에 어떤 후회도 없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수림 언니는 본인의 이혼 커밍아웃과 내 이혼 아웃팅 후, '이혼' 자녀 교육에 대해 아낌없이 조언했다. 요점은 아이 앞에서 전남편 욕을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 아이 입장에서는 아빠가 나쁜 사람이 되면 자기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다 알고 있었지만(예전에 이것과 관련해서 브런치에 글을 쓴 적도 있음), 내 앞에 있는 이 착한 오지라퍼 언니를 위해 "아~ 언니, 맞네요! 그렇죠 그렇죠~" 하면서, 20년간 갈고닦은 <아침마당> 방청객 리액션을 선물했다.


  내 주변에는 이혼한 사람, 이혼 중인 사람, 이혼할 사람이 몇 명 있다. 작년부터 퇴사가 유행이라고 하던데, 이혼도 유행인 것일까. <돌싱글즈>, <나는 SOLO 돌싱 편>, <우리 이혼했어요> 같은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이혼이 대중화된 것일까. 아니면 혹시 《시크릿》류의 책에서 얘기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이 이혼에 적용된 것인가. (내 주변엔 부자들도 많은데, 왜 부에 있어서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인가. ㅎㅎ)


  나는 결혼도 이혼도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며, 본인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래전부터 꿈꿔 온 진정한 행복은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나오는 노부부처럼 살다 죽는 것이다. (지금 그렇게 살고 계신 분들 너무 부러워요.) 나에겐 그 영화에 나오는 할아버지 같은 남편은 없지만, 선량한 오지라퍼 이웃이 있다. 이혼이라는 아픔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 금이와 다윤이에게도 서로의 가정사를 맘 편히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의 번호 따기 오지랖에서 시작되었다. 살면서 정말 꼭 오지랖이 필요한 순간이 있구나. 니부어의 '평온을 비는 기도'를 오지랖 버전으로 바꾸어 이 글을 마무리한다.


허지웅 <살고싶다는 농담>



신이시여,

참아야할 때 오지랖을 참아내는 평온함과

부려야할 때 오지랖을 부릴 수 있는 용기와

이 둘을 구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수림언니가 준 금이 입학 선물(언니는 입학 시즌, 아는 엄마 스무 명에게 이 꽃다발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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