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9살에 공룡이 주인공인 만화가 TV에 나타났다. 무시무시한 공룡 아니고 짤막한 키에 분홍 혀를 쏙 내밀고선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 어린아이 같이 생긴 말썽꾸러기 말이다. 저녁 먹을 시간 즈음이면 엄마는 만화를 틀고음식을 준비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가 그렇게 하신 건 저녁 먹기 전까지 우리가 뛰어다니거나 싸우지 않고 얌전히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식을 낳으니 과거 엄마가 우리에게 하셨던 행동에 대한 추측도 가능해진다. 당시엔 휴대폰, 아이패드 같은 재미난 기기들이 별로 없어 동생과 나는TV, 특히 둘리가 나오면 아주 사족을 못 썼다.우리는 모니터를 뚫고 들어갈 기세로 TV 앞에 바짝 붙어 만화를 봤는데 한참 중요한 타이밍엔 꼭 엄마가 나타나 뒤로 가서 보라고 말씀하셨다. 한 장면도 놓치기 싫지만 뒤로 안 갔다간 화가 나셔서 TV를 확 꺼버릴까 봐 후다닥 잰걸음으로 달려가 소파에 풍덩 다이빙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샌가 우린 또 슬금슬금 앞으로 엉덩이를 끌고 나가 TV 앞에서 좋아 죽겠는 얼굴로 헤벌쭉 웃고 있었다.
엄마와 1억 년 전 헤어진 둘리, 부모님이 유학 가서 혼자 남겨진 아기 희동이,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타조 또치, 타임코스모스가 고장 나 길동이네로 떨어진 비운의 외계인 도우너, 노래 재능이 없는 가수 지망생 마이콜까지, 모두 짠한 사연을 지닌 아이들. 하지만 길동이(고길동)는 항상 둘리와 친구들을 객식구라 표현하며 싫은 티를 대놓고 팍팍 내는 게 참 못되게 느껴졌다.물론 아이들이 가끔 길동이를 골탕 먹이려 한 적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순수한 호기심으로 벌어진 실수들인데 그럴 때마다 용서 한 번 없이 어린애들한테 소리를 꽥 지르며 화를 내니 너무 밉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성질 고약한 길동이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한 사람은 조카희동이었다. 쪽쪽이를 입에 물고 기저귀도 채 떼지 않은 걸로보아 3살 안쪽의 나이인데 꽤나 영악하고 은근 성질이 있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이로 확 깨무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반전은'형아 형아'하며 희동이가 좋아서 무척 따르는 이가 바로 길동이에게 갖은 구박을 받는 장난꾸러기 둘리라니,결국 외로워도 슬퍼도 최종 승자는 아기공룡 '둘리'가 아닐까?
둘리 VHS 비디오테이프
그 당시에는 공데이프에 본 방송을 녹화해 두었다가 보고 싶을 때 다시 틀어보는 게 유행이었는데, 우리가 하도 둘리 둘리 노래를 부르니 엄마가 직접 녹화를 해주셨다. 그러면 정말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보고 또 봐서나중에는 초반 회차의 대사까지 다 외워 동생과 역할극까지 할 수준이 되었다. 잘 개어놓은 이불이 거대한 빙하였고 선장역인 동생이 배를 타고 가다가 빙하에 부딪혀 그 안에 갇힌, 꽁꽁 얼어있던 둘리역의 내가 드디어 깨어나는 장면을, 누구 하나 봐주는 이 없었지만, 참 맛깔나게 연기했던 것 같다. 둘리와 희동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은 동생과 손잡고 훨훨 날아다니는 듯한 시늉을 했고, 어린 나이였지만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가 너무 예뻐 여러 번 반복해 들으면서 만화에 나온 무지개와 달님을 만나러 갔다. 동생과 내가 자지러지게 웃으며 좋아했던 '라면과 구공탄' 오디션 장면을 딸아이에게도 보여주니 너무 웃기다며 재미있어했다. 역시 훌륭한 작품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남녀노소 관계없이 좋은 평을 받을 수 있구나 싶어 나의 글쓰기도 그렇게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책을 읽고 재미가 있으면 작가에게 관심이 생기듯 둘리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작가 김수정 아저씨도 무척 친근하게 생각했다. 아저씨의 밝은 모습이 좋았고 내 사랑 둘리를 탄생시켜 주신, 내게는 은인 같은 분이었다. 요즘에는 무얼 하며 계시나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작년에 tvN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오셨던 모양이다. 예전에 비해 머리도 희끗희끗해지고 나이도 많이 드셨지만 오래전 잡지나 TV에서 봤던 김수정 아저씨만의 익살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둘리를 제작할 당시 이혼과 경제적인 부분으로 많이 힘드셨고 캐릭터와 라이선싱을 제대로 관리하는 곳이 없어 직접 회사를 설립해 지금까지 유지를 하고 계신다고 하던데 둘리를 지키기 위한 아저씨의 고생과 노력에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도 리마스터링 한 만화를 통해 둘리라는 캐릭터를 알고 있을 텐데 과연 내가 어릴 적 느꼈던 애틋하고 친한 친구 같은 느낌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멋있고 세련되고 화려하고 다양한 캐릭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시대에, 지금 보기엔 다소 촌스럽고 투박한 초록색 아기공룡의 이야기가 재미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기공룡 둘리 만화는 정말 순수했다는 거다. 둘리는 다소 버릇없는 캐릭터이지만 버스 안에 누가 있는지 물어보는 장면에서는 조심스럽게 "계세요?"라며 존댓말을 한다. 아무리 장난꾸러기더라도 예의는 지켰다. 물론 지금보다는 조금 더 경직된 사회 모습과도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겠지만 이야기들이 자극적이지 않고 참 담백했다. 길동이의 갖은 구박도 지금 생각해 보면 잔소리와 짜증 정도였지 요절복통 악동들을 돈 한 푼 안 받고 모두 먹이고 재워준 걸 보면 어른이 된 지금의 관점에선 길동이가 도인으로 보인다. 둘리와 친구들이 마냥 착하기만 해도 재미없었겠지만 너무 못되기만 해도 별로였을 것 같다. 적당히 사고뭉치였기에 나름 희열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짜 악인은 없었고, 그렇기에 둘리가 4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김수정 아저씨(작가님 호칭은 거리가 느껴져 안 하고 싶다.)
둘리 굿즈와 캐릭터를 모을 정도로 열렬하게 둘리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오래된 친구처럼,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찐친(진짜 친구)처럼, 생각나면 제일 먼저 연락하고 싶은 베스트 프렌드처럼 내 가슴속에 뭉근하게 자리 잡은 아기공룡 둘리는 어린 시절을 무지갯빛 꿈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준 소중한 추억이자 존재로 영원히 남을 것 같다.
호이 호이~
둘리를 좋아했던 과거로 돌아가 지지하던 천진난만한 추억 속으로 가줬으면 한다. 그냥 모든 것을 잊고 내려놓고 그 추억 속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