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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seen Universe Dec 01. 2019

4화. 나의 전주국제영화제

스물여섯의 봄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 당일 레드카펫을 진행하며

2015년 봄과 여름


나는 기억력이 정말 좋지 않아서,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고,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 마저도 잊고 지냈다. 별 수 없는 나의 약점을 대부분 받아들이며 살아왔고, 나는 때로 그것을 장기로도 여겨왔다. 나의 두 번째 축제였던 전주국제영화제는 망각으로 미화된 대표적인 추억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내게도 미화가 아닌, 생생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천변일 것이다. 봄이면 전주천 주변으로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괴상하고 어여쁜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다. 천변을 따라 산책로가 있는데 걷다 보면 뱀 조심 표시도 볼 수 있다. 나는 도토리골교에서 시작해 남천교까지 천변을 따라 걷곤 했다. 때로 그 길은 외로웠고, 때로 그 길은 위로였다. 


무용제의 계약을 마치고서 나는 전주국제영화제로 일터를 옮겼다. 나는 홍보 팀원이었는데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매체를 관리하는 지역 매체 담당자를 맡아 팀원들보다 일찍 전주로 내려가게 되었고, 안테나 직원처럼 홀로 먹고 자고 하며 다른 팀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지냈다. 홀로 전주에 내려간 날 객사 근처의 분식집에서 김밥과 라면으로 끼니를 든든히 채우고서는 낯설고 비좁은 방에 짐 정리를 하다가 적은 일기가 기억난다. 


2015년 3월 24일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기운 해가 어슴푸레 방을 밝히는 초저녁이 되었다. 짐을 싸는 내 마음은 왠지 조금은 서글픈 마음이 드는데, 그런 내 마음이 우습다. 그토록 나는, 나를 모른다. 이토록 짧은 여정에도 마음이 쓸쓸한 바보 같은 내가 무슨 해외취업을 하겠다, 이민을 가겠다고 그토록 얘기하고 다녔는지. ‘나’라고 믿었던 내 욕구의 민낯은 너무도 초라했다. 안국과 부암동에 익숙한 산책로를 사랑하고 김치에 계란말이뿐이어도 집 밥이 좋은 내가. 눈을 떴다.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집집마다 밥 냄새가 새어 나오는 시간, 집을 나섰다. 세상은 이토록 겪기 전까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은 이토록 겪기 전까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내가 몰랐던 나의 두려움들을 만나고, 얼어붙은 두려움을 조금씩 깨나 가면서 그렇게 전주 살이는 시작되었다. 사무실은 전주 객사 내에 있었고 나는 사무실에서 1분 거리에 작은 방을 얻어 지냈다. 낮이면 사람이 바글바글한 객사지만 아침엔 지나가는 개 한 마리 없는 한갓진 객사를 휘저으며 출근을 했다. 사무실은 좀처럼 보기 힘든 전체 개방형 구조로 위원장님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팀이 파티션으로만 나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일하는 모든 스태프들이 한눈에 훤히 보였고, 사방의 벽에는 영화제의 역대 포스터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촌스럽고 너저분했고 그런데 내심 정겨운 사무실. 나는 출근하면서 뒷문에 있는 우편함을 들러 배달된 신문을 챙겼다. 매일의 첫 번째 일과는 우리 영화제에 대한 기사는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축제가 가까워지면 오히려 개폐막작 출연진이나 올해 영화제의 특징과 같이 상세한 정보성 기사가 올라오지만, 그전까지는 시예산이 적절한지, 영화제가 지역 행사로서 기능을 잘하고 있는지 등 여러 관점의 비판적 기사가 보도될 수도 있기에 매일 아침 나는 우리 행사에 대한 외부의 평가를 점검하며 하루를 열었다. 나는 종이신문의 기사를 가위로 잘라 영화제의 역사가 생생하게 담긴 스크랩북에 붙이고 몇 달 간이나마 하루의 역사를 더해갔다. 


80년대 사무실 안. 넓은 공용 책상 위에 신문을 펼쳐두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자판기에서 뽑은 다방커피를 호로록 거리는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책상은 사무실의 출입구와 마주하고 있어 나는 자주 출근하는 사람들을 맞이했고 눈을 싱긋거렸다. 매일 아침 아홉 시면 어김없이 공용 책상 앞에 서서 신문과 한 잔의 커피를 마주하던 그 시간은 가장 여유롭고 가장 시골 사무실 같고, 가장 신선한 경험이어서 내게 전주의 향수와도 같은 시간으로 새겨졌다. 


제 16회 전주국제영화제를 준비하던 사무실. 커피와 커피와 커피의 연속이었다.


아침 업무를 마무리하고 점심이 되면 나는 급격히 외로워졌다. 나는 홍보 팀원의 안테나 직원이어서 우리 팀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 있고, 홀로 전주 사무국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매일 점심시간이면 나와 함께 점심을 먹어줄 팀을 찾아 두리번거리곤 했다. 당당하게 나랑 같이 먹자고 얘기는 못하고 귀만 쫑긋 대며 일어서려는 팀이나 내 이름을 언급하며 먼저 챙기려는 팀들의 손짓을 나는 기다렸다. 매일 정오에 그런 약간의 긴장감과 약간의 걱정이 마음에 잔잔히 흘렀다. 



그때마다 내게 구원의 손길을 뻗은 건 주로 운영 팀장님이었다. 그는 그의 팀원들과 함께 나를 데리고 이집저집 다니며 객사에 어디가 진짜 맛집인지를 가르쳐주었다. 갈치 찌개, 갈비탕, 닭볶음탕, 떡갈비와 김밥, 국수를 자주 먹었다. 그리고 나는 잘 기억했다가 서울에 있는 우리 팀이 내려오면 같이 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전주영화제는 해마다 5월에 하기 때문에 내가 지냈던 3~5월은 전주의 봄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었다. 오늘도 한 끼의 식사를 함께할 사람이 생겼다는 안도감은 봄볕만큼 따뜻했고, 어두운 사무실을 나와 마음을 살랑이는 오월의 바람을 쐬며 팀장님을 따라 뚤레뚤레 밥집으로 향하던 온도와 바람과 골목이 또한 내게 추억으로 기록되었다.



축제일이 가까워오자 서울에서 홍보팀 멤버들이 모두 내려왔다. 나도 마침내 우리 팀의 파티션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고 점심시간마다 두리번거릴 이유도 사라졌다. 홍보팀은 끈끈했고 마음이 잘 맞았다. 상황이 어렵고 일이 힘들어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좋아서 웃으면서 일했고, 저절로 힘이 났다. 숙소도 같아서 우리는 거의 24시간을 함께했는데 그래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GV 통역 중. 우측의 이상용 프로그래머님 석연찮은 눈빛을 보내고 계신다. 


물론 전주영화제에서도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급여를 받았다. 그래도 월급날이면 몸보신 겸 갈비탕을 먹으러 다니고, 밤이면 가맥집에서 먹태에 맥주를 뜯으며 회사 이야기나 옛 연인 이야기를 밤새고 나누었다. 이들 때문이었을까. 이 무렵 나는 꿈도, 돈도 아닌 마음 맞는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걸로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꿈과 직업에 대한 허상들을 조금씩 걷어내고 손에 잡히는 행복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개막 준비가 다가오면서 날씨만큼 사무실의 열기도 뜨거워졌다. 본격적으로 엄청난 양의 기사가 릴리즈 되고 객사는 각지에서 온 영화인과 영화팬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기사를 쓰고, 보도되는 기사들을 관리하고, 때때로 통역가 일정이 펑크 나면 지원도 나가며 낮이고 밤이고, 끼니고 잠이고 없는 시간을 지난하게 버티다 보면 어느덧 깊은 밤이 찾아오고 낮의 열기가 체 가시지 않은 객사의 밤거리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길. 그 날 있었던 열 받는 일, 웃기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팀원들과 깔깔대며 문득 ‘왜 나는 이게 행복하지’ 하는 생각을 하며 왠지 모르게 싫고도 좋은 마음을 가슴에 안고 잠에 들던 날이었다. 그렇게 열흘 남짓한 영화제 기간을 어찌어찌 보내다 보면 어느덧 객사도 한가해지고 축제의 열기도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하는데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전주 살이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제 기간 홍보팀은 프레스룸으로 사무실을 옮겨 행사를 치렀다. 이유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것들로 눈물 쏙 빠지게 웃으며 일했다.



왜 그 순간이 그토록 즐거웠는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축제일이 내 꿈이어서였는지, 축제가 주는 그 뜨거움이 좋아서였는지, 혹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업무의 밀도와 강도로는 무용축제보다 배로 힘들었음에도 말이다. 


분명한 것은 작지만 분명한 희열이 내게 자주 찾아왔고 나는 몸 깊은 곳에서 어떤 작은 떨림이 진동한다는 것을 느꼈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매력적인 문화판을 내 손으로 만든다는 것과 전주 일대를 가득 매운 영화팬들을 보는 일이 가슴 벅차게 행복했고, 동시에 축제판이 월급도 박하고 일상도 지옥 같지만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면서 두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들과 매일같이 부대끼고 밥 먹고 깔깔대며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쩌면 나는 축제를 만들고 싶었고, 그보다 내 삶이 축제가 되기를 바랐던 걸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색깔이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하고 나누면서 날마다 삶을 허비하지 않고 창자 깊숙한 곳부터 뿜어져 나오는 웃음으로 깔깔대며 언제나 기쁨으로 충만하게 살기를. 엄청난 양의 소주와 맥주와 커피를 전주에서 마시면서 나는 그것을 조금 알게 되었다. 


영화제의 끝에서, 전주의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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