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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Apr 08. 2022

놀이터의 벌 한 마리

작은 놀이터가 있다. 얼마만큼 작은가 하면 붙어 있는 미끄럼틀 두 대가 전부인 놀이터다. 계단 다섯 개 오르고 원통이라는 장애물을 지나면 탈 수 있는 작은 아이 미끄럼틀에 붙어, 계단이 아니라 동그란 난간을 밟아 오르면 외줄 타기를 연상하게 하는 긴 나무토막이 놓여 있고, 그 나무토막을 밟고 오르면 지그재그 모양으로 나열된 짧은 나무토막을 건너야 탈 수 있는 큰 아이 미끄럼틀로 이루어졌다.


포근한 봄 햇살 아래서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아이의 가는 머리카락을 날린다. 미끄럼틀을 좋아하는 아이는 신나서 작은 아이 미끄럼틀과 큰 아이 미끄럼틀을 오가고 있다. 아이가 난간을 하나 밟고 올라서 전화 통화 중인 엄마를 부른다. 급하게 전화 통화를 끝내고 아이 옆으로 가니 계단 손잡이에 벌 한 마리가 딱 붙어 떠나지 않는다. (페인트칠된 빨간색이 꽃인 줄 아는 건가)


“작은 미끄럼틀은 안 타면 되니까 계속 올라가도 돼. 이곳으로 날아오지는 않을 거야.” 아이는 벌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나, 미끄럼틀 안타.”난간에서 내려온다. “다른 곳에 가자” 손을 잡아끈다. 여전히 봄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아이의 가는 머리카락을 날린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벌 한 마리로 긴장한 아이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사라졌다는 걸까.


삶의 리듬이 있다는 앨리스 메이넬(영국의 시인이자 수필가)은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고 한다. 행복은 사건에 달려 있지 않고 마음의 밀물과 썰물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줄어들고 사라지는 이유도 상대방의 외적 변화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운율이라는 주기성 때문이라고. 삶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주기성의 법칙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희망이나 두려움이 없어진다고. 이건 법칙이라고.


흔히 듣는 ‘지나간다’는 말은 꼭 시련 자체가 물러나 없어진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 시련에 익숙해지고, 슬픔이라면 슬픔이라는 옷을 입고 일상이 가능해진다는 말 같다. 지나는 것은 시련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의미랄까. 시련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타협이 가능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주기성의 법칙을 얼마나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벌 한 마리로 놀이터를 포기하지 않는 연령이기는 하다. 벌 한 마리 앵앵거린다고 들어가야 하는 슈퍼에 가지 못하거나 벌 한 마리 날아다닌다고 아침 산책을 그만두지도 않는다. 꽃인 줄 알아 떠나지 않는 미련한 벌 한 마리로 아이는 놀던 놀이터를 깨끗하게 포기했다. 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봄바람은 여전히 살랑이며 불어왔다는 것. 노란 개나리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목련 봉오리가 향기롭게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 연하게 돋아나는 초록으로 다시 걷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으며, 지나가던 개 한 마리의 ‘멍멍’ 짖는 소리에 아이의 얼굴에 다시 즐거운 웃음이 돌아왔다는 것. 이런 것 역시 법칙일까.      


삶의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주기성의 법칙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어떤 것이 지속되리라는 희망이나 두려움이 없어진다. 젊은이의 슬픔이 너무도 절망에 가까운 것은 젊음의 무지 때문이다.

삶이 늘 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운율은 있다. 생각의 궤적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주기성이 마음의 경험을 지배한다.

<천천히 스미는>에 수록된 엘리스 메이넬 산문 <삶의 리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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