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꼼짝 않고 지내다가 공기에서 맡아지는 꽃향기에 길을 나섰다.(라일락 인가, 라일락은 아직 필 시기가 아닌데. 킁킁, 좋다.) 내가 길을 나서는 이유라면 아이들 옷을 사기 위해서나 머리를 다듬기 위해 옆 동네를 나들이 삼아 다녀오는 거다. 그동안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배송을 이용하거나 동네 작은 마트나 슈퍼를 다녔다. 머리 길이는 그대로 두고 버블 염색약으로 겉 새치만 간신히 가렸다.
소리의 학부모 상담 날짜와 시간이 잡히자 남편에게 연차를 쓰도록 했다. 비대면이라 전화로 진행되고 이십 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위해 연차를 쓰는 것에 남편은 의아해했으나 마음 편하게 상담하고 싶어서. 아이들을 돌볼 다른 사람이 없으면 선생님과 대화를 어떻게 해. (이런 기회에 쉬어가자는 말이지, 는 생략한다.)
소리는 학교 가고 나도는 아빠와 보내는 평일 오전, 나는 외출한다. 염색을 일찍 끝내고 남은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미용실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왔더니 항상 해오던 미용사분이 열한 시 출근하는 날이라고 한다. 염색이라 다른 분한테 하려고 했더니 이십 분에서 삼십 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열 한시에 다시 방문할게요, 미용실을 나왔다.
봄 햇살은 쨍하게 비추고 리듬감 있는 가요가 거리에서 흘러나온다. 전자 대리점에 액세서리 가게에 각종 음식점에. 지나다니는 인파로 어지럽다. 이럴 때 발길이 향하는 곳은 익숙한 대형마트. 더워지는 날씨에 아이들 여름옷을 살펴보는데 적당한 게 보이지 않는다. 마트에서 나와 걷다가 다시 익숙한 중고서점으로 들어간다. 빗방울 같은 피아노 선율이 톡톡, 토도톡 톡톡 공중을 떠다니고.
피츠제럴드 단편집이 있네, 좋을 거 같은데. 무라카미 하루키 티셔츠 에세이집이 이거였구나. 산뜻한 색상의 요즘 스타일 표지 신간 소설들. 예쁘다, 감탄하다가 손에 든 것은 법정 스님의 <봄 여름 가을 겨울>, <홀로 사는 즐거움>
두 권의 책을 계산하고 중고서점을 나오면서 나는 왜 멀끔하고 산뜻한 책들을 뒤로하고 예스러운 두 권의 책을 가지고 나온 걸까. 무엇이 내 시선을 두 책에 머물게 한 걸까 생각한다. 시간을 확인하며 미용실로 향한다.
속 머리를 살피며 깜짝 놀라는 미용사를 만나 염색을 진행하고. 집으로 돌아와 소리의 담임 선생님과의 전화상담도 무사히 마쳤다. 저녁 설거지까지 끝내 놓고 오늘 한 일이 없네, 시간이 금방 갔어. 남편에게 말하니 아이들과 인형놀이를 하고 있는 남편은 너는 염색이라도 했잖아. (하루 종일 나는 육아란 말이지, 는 남편도 생략했겠지.)
자려고 누웠는데 일 년 만에 오셔서 염색한 거네요, 미용사의 말이 떠오른다. 그 말과 함께 수행이 필요한 거였어. 법정 스님의 책을 두 권 들고 나온 이유는 마음이 나에게 수행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거였어. 아, 그거였어. 수행! 두 권의 책을 데리고 온 이유를 알아서 마음 편하게 잠에 들었다.
하루하루의 삶이 소모적인 동시에 자기를 형성하는 일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이 세상을 내 힘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을 바에야, 내 자신의 생활 구조만이라도 개조해 보고 싶은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며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을 뜻한다.
수행자는 그날그날 하루살이여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날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기를
법정/류시화 엮음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