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방바닥에서 빨래를 개는 아낙네는

비 오는 날의 단상

by 북남북녀

취향도 참 촌스럽다고 방바닥에서 빨래를 개는 아낙네는 생각한다. 손으로는 바삐 빨래를 개면서.

눅눅해진 집안 공기와 흐릿한 회색 하늘에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 위로하며 다정했던 사랑한 사람"을 흥얼거리면서.

이 무슨 청승 이노, 비 오는 날에.


몸이 아파서 병실에 있었겠지.

병원의 소독약 냄새에 진저리를 냈을 거야.

기력 없이 창밖을 바라봤겠지.

바람과 비에 나부끼는 이파리들에 한없이 처량해졌을 거야.

이리저리 흔들려야 하는 연한 잎의 고충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까.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기타를 들고 온 사람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진 병실로, 생기 있는 것은 전혀 볼 수 없는 그곳으로.

그게 누구이든지 비 내린 후 햇살 돋는 날처럼 반짝반짝하고 윤이 났을 거야. 따뜻한 해가 두둥실 떠오른 것 같았겠지. 창백한 소녀에게는.


비 오는 날 흥얼거리는 노래와 마음으로 보여지는 그림에 이 무슨 청승 이노를 되뇌며 아낙네는 초등학교 교실을 찾아간다. 손으로는 바삐 빨래를 개면서.


예상치 못한 비가 창밖을 세차게 때리는 날, 아이는 교실 창으로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혹시라도 누군가 나와 있을까, 아니겠지. 오늘도 비를 맞고 가야겠지. 책가방 속 책들까지 또 흠뻑 젖겠지. 세찬 비에.


실내화 주머니에서 운동화를 꺼내며 아이는 보지 않는 척 흘깃 앞을 본다. 역시나 엄마나 아빠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 앞에 서있다. 자신의 아이가 나오면 뛰어와 우산을 받쳐주려고.

비 오는 날 뛰어가서 안길 누군가 있다는 것, 비 오는 날 우산을 받쳐 줄 누군가 있다는 것이 아직은 필요한 아이다. 곧 커서 제 우산은 제가 가져가거나, 사거나 할 때가 오기는 오겠지마는.


자신의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들의 눈길과 부딪치는 것을 피하면서 아이는 신발을 갈아 신는다. 곧 뛰어갈 준비로 심호흡을 하면서. 그것은 뛰어갈 심호흡이기보다는 제가 이렇게 비를 맞으며 가기는 하지만 그렇게 불쌍한 아이는 아니거든요. 불쌍하게 안 보셔도 되거든요, 라는 오기의 심호흡이기도 하다. 아무도 불쌍하게 여기지 않지만 ‘불쌍’이라는 단어에 스스로 열을 내는 것이 자신의 마음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훗날 더 훗날 아이는 알게 된다.


온몸에 흠뻑 비를 맞아 머리부터 빗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아이에게, 같은 방향으로 걷던 마음씨 착한 여성이 우산을 받쳐준다. 아이는 이미 체념한 뒤다. 누군가 기다리는 것을. 타이밍이 안 맞는 친절은 번거로울 뿐이다. 됐거든요, 라는 말은 건네지 않지만 필요 없다는 행동을 취하며 아이는 우산 속에서 빠져나간다. 타인의 친절로 마음이 불편하고 싶지 않은 아이는 비를 맞으며 이 십여 분 걸리는 집을 타박타박 걸어간다.


신발은 빗물로 가득 차서 가히 물속을 걷는 듯하다. 발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빗물에서 물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온다. 보글보글, 보글보글. 혼자가 아니라면 재밌다고 깔깔깔 웃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집에 가서 양말을 벗으면 빗속에 퉁퉁 불은 발만 볼 수 있겠지.

아이는 물웅덩이를 피해 가면서 철벅, 철벅 계속 길을 걷는다. 이미 흠뻑 젖어 소용은 없을 테지만.


창가에 나부끼는 초록 이파리를 볼 때나, 물기 젖은 거리를 내다볼 때. 눅진한 공기가 몸속에 가득 차는 느낌이면 기억은 찾아든다.


<그때 그 사람>이라는 쿵작, 쿵작하는 선율에,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던 사랑하던 사람이라는 가사에, 얼마나 기다렸을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메고 온 그이는 얼마나 햇살 같았을까.

외로움에 지친 이파리들도 좋아서 이리저리 흔들렸을 거야. 세찬 비가 덜 무서워졌겠지

당신이 와서 좋다고는 말하지 못했을 거야.

하염없이 나무만 쳐다봤겠지


비 오는 날 방바닥에서 빨래를 개는 아낙네는 이 무슨 청승 이노를 되뇌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아이들의 옷, 손안에 들어오는 부드러운 감촉.

점심으로는 시큼한 김치 썰어 전이라도 부쳐야지, 손으로 죽 찢어먹는 찜이 나으려나.

빗물은 창밖에서 떨어지고 일상은 흘러간다.

시금털털한 김치 향내와 세탁물의 청량감에 싸여.

이리 뛰고 저리 뛰려는 아이들을 제지하려고 목소리는 한껏 높이면서.

그러면서도 아낙네는 간간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이 무든 청승 이노를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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