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키가 컸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시인과 촌장. 가시나무 중
불운이었는지 모든 집들이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유년 시절부터 십 대 시절을 보낸 동네는 두 개로 나눠졌다. 유년 시절을 보낸 동네는 빈민층 집과 높은 담장의 부유층 집으로. 십 대 시절을 보낸 동네는 주소를 들으면 아 거기,라고 감이 오는 개발된 아파트 동네와 개발 예정지인 산동네 집들로.
주소에 따라서 부모의 경제 상태나 사는 정도가 짐작되는 동네였다. 반장, 부반장 하는 임원들은 저쪽 동네였고 의사, 변호사 하는 엄마나 아빠들 역시 저쪽 동네였다.
지금 꺼내 놓는 이야기는 비닐로 올린 무허가 건물 빈민층 동네와 붉은 벽돌로 담장이 높게 쳐진 부유층 동네에서 비닐로 올린 무허가 건물 빈민층 동네에 살던 때 이야기다. 불행한 것은 종교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나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육체도 입고 있다는 거다. 나는 마음으로 믿는 종교를 육체로 경험했으니 그 경험이 유쾌하지 만은 않게 자리를 잡았다.
그 아이는 키가 컸다. 초등학교 4학년인데도 한 6학년은 돼 보였다. 같이 있으면 언니 같았다. 초등 4학년이 좋아하는 가수가 시인과 촌장이라고 했다. 테이프를 선물한 적이 있어서 들어봤는데 내 초등 4학년의 감성으로는 울림이 크지 않는 노래들이었다. 그 노래들이 괜찮다고 생각한 것은 성인이 되어 사회라는 곳을 경험하면서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다는 실의에 젖어들 때였다. 쓴 술이 달다는 것을 발견할 때, 어른이 되어도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키 크고 조숙한 아이는 천으로 만든 보조 가방을 우리 친구 숫자대로 가지고 왔다. 어디서 생겼다는 거다. 조리 모양에 책이 두 세권 들어갈 듯한 크기에 가방끈이 길어 크로스로 착용할 수 있었다. 하늘색과 주황색 가방 네 개를 들이밀면서 하나씩 가져가라고 했다. 그것은 아무도 매지 않은 새 가방이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포장지에 싸서 선물이라고 내밀었다. 친구들은 입이 벙긋 벌어졌다. 예쁘다고 난리였다. 나 역시 미소를 띤 채 다른 친구들처럼 고맙다고 말하며 가방은 받았으나 마음은 찜찜했다. 속이 편안하지 않고 껄끄러운 것이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또 한 번은 키 큰 아이가 우리에게 맞을 것 같은 원피스를 가지고 왔다. 그것 역시 누구도 입지 않은 빳빳한 새 옷이었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 중에 새 옷을 입을 수 있는 아이는 얼마 없었다. 우리들 모두는 엄마가 어디서 주워 오거나 받아온 색깔도 바랬거나 얼룩이 잔뜩 밴 생활감이 충만한 옷들을 입고 있었다. 새 옷에, 그것도 언제나 입고 싶어 하던 원피스에 친구들은 입이 한껏 벌어졌다. 키 큰 아이는 자신이 선물 받았는데 사이즈가 안 맞는다는 말을 했으나 나는 키 큰 아이의 의도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누가 저 아이에게 이렇게 작은 옷을 선물할 것이며 그것도 네 개나 비슷한 옷을 선물할까.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서 부패의 향을 감지하는 것처럼 새 옷에서 불미스러운 냄새를 감지했다. 배려심이 깊고 상냥하고 초등 4학년으로서는 조숙해 보이는 그 아이의 존재가 달갑지 않았다.
키 큰 아이는 우리가 ‘우리’라고 부르는 무리와는 인연이 없었다. 담장이 높게 쳐진 부자 동네 근처 이제 시작한 개척교회에서 만나게 된 사이다. 그 아이는 담장이 높게 쳐진 부자 동네에 사는 아이다. 개척교회기 때문에 교인이 얼마 없었고 떼 지어 몰려다니는 비닐집에 사는 아이들인 우리가 수적으로 우세했다. 예배 끝나면 하나씩 주는 과자를 받아오는 재미로, 교회 선생님의 상냥함과 율동하는 재미로 우리는 일요일마다 무리 지어 교회를 다녔다.
교회 선생님이 우리를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하여 함께 집 방향으로 걸은 적이 있다. 우리는 눈빛을 서로 마주친 후 집 근처에서 뱅뱅 돌다가 선생님께 돌아가시라고 했다. 우리끼리 가겠다고. 이 정도 바래다주셨으면 괜찮다고. 아무리 상냥한 선생님이라도 우리 사는 집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사는 집을 보이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집에 사는지 선생님이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우리의 완강함에 발길을 돌렸다. 지금 생각하면 선생님은 우리가 어디 사는지 모르지 않았다. 우리 하고 있는 차림만 봐도 우리의 형평과 사는 곳을 짐작할 수 있었을 거다. 그 선생님 역시 담장이 높게 쳐진 주택가에 살고 있었고 아마도 더 많은 동정을 베풀기 위해 우리들의 집으로 들어오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눈물이 많았던 선생님은 더 울기 위해 우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키 큰 아이는 우리 중 소수에 속하는 부촌 아이다. 다른 몇 명의 부촌 아이들이 있었으나 그 아이들과는 말을 할 기회가 없었다. 그 아이들은 우리와 어울려 놀지 말라는 부모의 지시를 받고 있거나 또는 우리와 말을 하기에는 우리가 괴상해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우리가 ‘우리’라 부르는 무리와 부촌 동네 아이들은 서로 섞이지 않았다. 우리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키 큰 아이를 제외하고는.
키 큰 아이는 부촌 동네 아이들과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와도 어울리려는 행동을 보였다. 말하자면 중간자의 노선이고 그 중간자의 노선에는 그 아이 딱 한 명 이었다. 외로운 늑대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었겠다. 그 나이에 나무에 가시가 많다는 노래를 좋아하는 감성으로는 당연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키 큰 아이는 우리를 얼굴 붉히게 한 적이 없으며 어느 때나 예의 발랐고 어느 때나 잘 베풀었고 어느 때나 상냥했고 어느 때나 잘 참아줬다. 계속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주고(항상 반짝반짝한 새 걸로)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는 노력을 보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거나 생각하려고 고개를 반은 수그리고서.
나는 지금에서야 내가 그 아이를 왜 그렇게 미심쩍어하며 불편해했는지 조금씩 파악한다.
선물 받은 물건을 좋아하는 친구들로 인해 왜 내 얼굴이 붉어졌는지도.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매부리코에 얼굴이 긴 편인 그 아이를 지금 만나면 알아보지 못하게 변해있을 것이라는 좋다. 나 역시 그 아이가 알아보지 못하게 변해 있을 거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우리가 거리에서 스쳐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절대 알아보지 못할 거다. 잠깐의 인연으로 얽힌 적이 있으나 그 아이의 호의가 남달랐으나.
동정으로는 친구가 되지 못한다. 마음은 평등을 원한다 해도 주는 자, 받는 자의 수직이 생긴다. 상냥한 키 큰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나는 스스로를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으로 그 아이는 나에게 더 반갑지 않은 존재가 된다. 한 끼를 굶게 되더라도 배은망덕하다는 생각을 주지 않는 사람이 좋다.
끼니를 굶어본 적이 없다. 낡은 옷이라도 비싼 가방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물건들은 가지고 있었다. 굳이 그 아이의 베풂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친구들로 하루는 놀기에도 바빴다. 처지를 생각하며 비관하기에는 원하는 것이 적은 나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충만하게 흘러갔다. 그 충만함에 키 큰 아이는 상처를 냈다. 나를 동정받을 사람으로 바라보면서. 스스로를 동정하는 시선으로 본 적이 없는데, 그 아이의 시선에서 나는 동정받는 사람이 됐다. 얼마 후 부촌의 아이들이 수적으로 우리를 뛰어넘을 때 나는 그 교회 다니는 것을 그만뒀다. 마음으로 믿는 종교를 육체로 경험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가난한 자에게 베풀라는 말에 가난한 자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동정받을 처지는 빨리 벗어나는 게 좋다. 동정으로는 제대로 살지 못한다.
키 큰 아이의 선량함은 내게는 상처였고 그 아이의 선물은 나에게 불길했다. 그렇게 비틀린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데 그걸 되뇌어서 뭘 어떻게 할 건가라는 노래에 대한 삐딱함은 노래에 대한 것만은 아닐 거다. 그 노래 부르는 가수를 키 큰 아이가 좋아했다는 것을 내가 기억하고 있을 경우에는 더더욱.
“솔직히 이야기해서 앞으로는 더 어둡고 더 살기 힘든 세상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회라고 할까요.” 일본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말이다. 작가는 자기 딸에게도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한다. 세상은 어둡다고.
세상 자체가 어둡다면 나는 그 어두운 세상에 속한 사람일 뿐이다. 어두운 내가 문제 덩어리가 아니라.
키 큰 아이를 떠올릴 때면 호의를 호의로 보지 못하는 내 비틀림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꿈은 뱅뱅 돌던 골목, 골목을 비춘다.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 상냥하고 예쁜 선생님을 감히 집으로 들일 수 없는 아이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