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귐

짧은 이야기

by 북남북녀
밤은 안개 속에서 마무리되었고 별들은 여전히 떠 있으나 멀리서 반짝이는 빛은 우리에게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로맹 가리


피가 퐁퐁 솟아올랐다. 순간이었다. 참치캔 뚜껑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베인 것은. 피가 멈추지 않아 휴지를 돌돌 말고 약국을 찾아갔다. 약사에게 어떻게 하냐고 물으면 좋았을 텐데 지혈제를 달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칼에 베였을 때 매니저가 지혈제를 뿌려준 게 기억났다. 피가 멈추지 않으니 그 방법만 생각났다. 집으로 와 돌돌만 휴지를 제거하니 역시나 피가 퐁퐁 솟아났다. 그 위로 하얀색 지혈제를 수북이 쏟아부었다. 제발 멈추라는 간절함을 담아. 더 이상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M이 집에 찾아왔고 참치캔을 따서 밥을 먹으려고 했다. M은 내 침대 위 내 베개를 베고 누워 있다. 라디오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팝이 흘러나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경쾌한 리듬으로.


“아무래도 응급실에 가야겠어, 피가 멈추질 않아.”

M은 누워서 갔다 와라고 대답한다. 기다리겠다고 말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병원에서는 엑스레이를 찍고 봉합을 결정했다. 지혈제를 듬뿍 뿌린 결과는 마취하기 전 생살을 면도칼로 파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처 사이사이에 자리한 하얀색 가루를 모두 제거해야 하기에 의사는 손가락에 생리식염수를 쏟아붓는다. 은색 면도칼로 상처 부위를 헤집는다. 으으 라는 비명을 작게라도 낼까 봐 나는 바짝 긴장한다. 비명을 감추기 위해서. 아픔으로 나오는 비명을 다시 삼키기 위해서. 이런 일은 일상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는 서있고 치료라는 게 다 이렇죠라는 표정으로 의사는 생살을 헤집는다. 의사가 면도칼을 놓고 마취 주사기를 들었을 때 안도한다. 끝났다. 면도칼의 시간은.


가까운 외과에서 소독받으라는 얘기를 듣고 세 바늘 봉합한 손가락을 붕대로 둘둘 말고 집으로 돌아온다. M이 침대에 누워 나를 본다.

“배고파”

“아, 미안.”

이번에는 신중하게 쇠젓가락을 이용해서 참치캔 뚜껑을 딴다. 김치와 참치 캔 뿐인 밥상을 앞에 두고 우리는 밥을 먹는다. 할 일은 오직 밥 먹는 일뿐이라는 듯이 조용하게.

M은 치매 할머니를 피해 나에게 왔다. 치매 할머니의 끊임없는 잔소리와 발작하듯 쓰러지는 부모를 피해.

“잘 먹었다.” M이 일어선다. 현관까지 M을 배웅한다. M은 붕대 감긴 내 손을 흘깃 본다. 얼굴에 잠깐 웃음이 어린다. 아주 잠깐, 몇 초동안. 나는 미소 짓는다. 잘가구. 환한 미소를.


화장실에는 오물이 가득하고 길에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심각하네 이건, 하며 길을 걸었다.

가면을 꼭 써야겠어, 물어서 그러면 안 돼냐고 되물었다.

가면을 쓰는 이유는 아픔이 전달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비틀리면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은 살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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