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른 새벽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누군가는 태어난다. 세상이 유지되는 까닭이다. 이 순간에는 누군가는 죽음과 탄생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고 있을 거다.
어제 퇴근 전에 한 사람의 부고를 접했다. 건축학자 박철수교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의 죽음 때문에 핸들 잡은 눈에 물방울이 맺혔다. 달리는 내내 몇 번 그랬다.
눈물의 이유가 궁금했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인 듯 했다. <한국주택유전자>라는 1300쪽이 넘는 괴물같은 그의 책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책을 만지면 그의 생각과 삶이 느껴지는 듯 하다. 평생 학자로서 평범한 사람들의 주택을 연구하며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 자료를 통해 보여준다. 그는 말하지 않고 보여준다.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으나 그의 생각을 느낄 수 있다. 왜 우리의 주거 문화는 이럴 수밖에 없는지 강렬하게 보여준다. 주장을 하지 않음으로써 누구보다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 때 집에 대해 좀 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기획한대로 집을 한 채 지었고, 신축같은 리모델링을 한 뒤부터다. 집이 어떻게 지어지는지 집을 대할 때 눈에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집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보였다. 한 참 집에 관심이 많을 때(재테크가 아니라, 집 자체로서의 집) 풀리지 않는 큰 의문이 있었다.
자유시장경제에서 대부분의 상품은 소비자 중심인데(소비자의 필요와 요구에 철저히 맞춰진다는 의미에서..) 가장 비싼 상품인 집은 소비자가 끽 소리 못하는 공급자 중심의 상품이라는 점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집을 지어보거나, 오래오래 살 집을 사려 한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집은 선택지가 별로 없다. 수억에서 수십억을 돈을 지불하면서도 어떤 집을 지어 달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보다는 "잘 부탁드립니다!"며 저자세를 유지해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 믿는다.
'집은 이렇게 짓는 것이니, 모르면 돈이나 입금하고 잠자코 있어'라는 태도를 가진 건축업자들이 많고, 건축주는 '아.. 그런가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태도로 수렴된다. 건축주와 건축업자가 서로 논쟁하고 다투어서 좋은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누군가가 앞서 지어 놓은 집을 구매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도 물론 돈의 문제다. 부족한 돈으로 좋은 집을 지으려니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현실적 대안이 없다. 설계부터 구조체, 마감까지 계속 돈과의 싸움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를 다니면 한국의 집은 과연 가성비가 괜찮은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다양성이 부족하다. 한국에 태어나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야 한다는 생각처럼 집은 곧 아파트라는 획일성 때문에 집에 대한 선택지는 별로 없다. 건축업자가 공급 논리로 창조한 세계에 강제 이주당한 소비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다. 평생 살고 싶은 꼭 마음에 드는 집이 없으니 기꺼이 유목민이 되어 집을 투자의 대상으로 여기려는 마음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집이 좋은 집인지 소비자가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잘 모르기 때문에 이런 집을 지어달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 잘 모르니까, 요구하는 돈을 주고, 업자의 비위가 상하지 않게 때로는 비굴한 웃음으로 눈치를 보며, "잘 부탁드립니다!"고 말하는 게 건축주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 모른다. 혹여 집에 대해 잘 알아도 결과는 비슷하다. 정해진 예산 범위에서 그렇게 지어줄 사람을 찾기 힘들다. 아파트를 구매할 때도, "어머, 주방이 잘 빠졌네!..." 라며 구조나 마감재 중심으로만 볼 뿐, 재료나 설계 구조처럼 집을 구성하는 본질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층간 소음을 아침저녁 지저귀는 새소리로 여기는 자기개발능력이 요구된다.
알면 알수록 그 앎을 구현한 집을 찾기도 힘들고, 짓기도 힘든 현실과의 반복된 간극 때문에 집에 대한 관심은 점점 엷어졌다. 지금은 비새지 않고, 채광 좋은 방에 많은 책과 넓은 책상을 둘 수 있는 공간을 바랄 뿐이다. 집에서 방으로의 관심 이동은 주택에서 아파트로 가는 과정이다. 요즘은 그래도 집에 대한 바람직한 관심이 예전보다 많이 늘어난 것 같고, 정보들도 좀 보이지만, 첫 집을 지었던 2008년만 해도 평생 살 진짜 괜찮은 집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짓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뭘 어떻게 할 지 몰라 막막함과 좌절을 느꼈다. 한 쪽에서는 좋은 변화가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상황이 더 나빠진 듯 하다.
치열한 연구를 통해 묵묵하게 '삶의 장소성이 깃든 집'에 대해 말해 온 박철수교수는 한여름 땡볕 들판의 쉴 자리를 선물하는 큰 느티나무 같은 분이다.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 사회는 투자의 대상이 아니라, 주거하는 공간으로서의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한 사회 문화의 중심은 의식주인데, 우리는 집을 너무 모른다. 투자 말고는 대중들의 적극적 관심이 없으니, 업자들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집을 사는(living) 곳이 아니라 사는(buying) 것으로 만든 듯 하다. 한국에서 삶이 켜켜이 쌓인 장소성이 담긴 집을 찾기란 유럽 도시에서 일산 신도시를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우리는 집에 집착한다. 그 집착하는 집 때문에 우리는 유목민이 되었다. 몽골의 유목민은 때가 되면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우리는 다시 돌아갈 곳이 없다. 기억을 더듬어 돌아가면 재건축과 재개발이라는 늘 새롭기만 한 황량한 아파트 사막을 만날 뿐이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시대가 시작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일본인과 부자들을 위한 집을 대대적으로 지었다. 조선 민중, 우리 이웃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집은 그곳에 없었다. 625전쟁 때 집은 파괴되었다. 박정희때는 수천년 문화가 깃든 전국토의 집을 모조리 부수고, 발암물질 가득한 스레트집으로 만들었다. 경제 부흥기에 업자마인드의 가성비주택이 조금 지어졌으나 곧 아파트가 암세포처럼 번졌다. 아파트도 장점이 많은 주거방식이다. 어릴 때는 한국은 국토가 좁고 사람은 많아 아파트밖에 대안이 없다는 말을 교사들이 가르쳤다. 지금은 사람이 줄고, 구도심에는 빈집이 늘어나는데 수직형 밀집구조의 집을 저렇게 많이 지어야 하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월 우리는 집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아왔다. 그 소외감 때문에 박철수교수의 부고에 눈물이 난 것 같다. 그 소외감을 극복해 보려는 진실한 학자의 치열했던 오랜 연구와 성과물 때문에 눈물이 난 듯 하다. 30년 동안 온갖 자료를 찾으며 연구한 성과물을 6년 동안 집필해서 펴 낸 책이 <한국주택유전자>다. 이 책에는 지난 100년 동안 이 땅에서 살아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의 소외되고 잊혀진 삶이 고스라니 담겨 있다. 집이라는 주제 속에 장소성으로서의 삶을 거리를 두고 담아내는 일.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눈물이 나나 보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행복하게 살며 오래오래 기억될 집을 직접 지어, 살구나무 아랫집이라고 문패를 달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알 것 같다. 그가 생각했던 집은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는 어떠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