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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Jul 14. 2022

무계획자의 불렛저널

P인간도 불렛저널을 쓸 수 있다

나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편이다.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에게 계획이라곤 병원 예약과 매주 두 번의 운동이 전부다.


회사에 다닐 때는 출근 시간을 지키는 것이 힘들었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수십 개의 자잘한 일을 처리하고 십분, 오십 분 단위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춰 생활하니 퇴근 후에는 어떤 것에도 맞춰 살고 싶지 않았다. 시간 약속이 버거워 퇴근 후 운동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그땐 단지 피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짜인 스케줄에 취약한 류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둔 후 나는 어느 종소리에도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 아침을 깨우는 알람 소리부터 매 시간 울려대던 종소리까지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나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하루가 흰 도화지이고 무엇이든 내 맘대로 채워 넣을 수 있던 그때, 나는 그냥 내 맘대로 살았다. 책을 많이 읽었고 다이어리 꾸미기를 많이 했고, 불렛저널을 썼지만 어떤 것도 계획해서 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냥 뭔가를 할 수 있을 때나 하고 싶을 때 그것을 했다. 매우 즉흥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스타 계정에 불렛저널을 올리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팔로워 수가 급증하면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빠졌다. 만 명 단위의 팔로워를 가지고 있는 다이어리 인스타그래머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mbti의 마지막 항목이 J인 것이다. (나는 당연히도 P다) 그건 그들의 다이어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매일 할 일이 적혀 있었고, 심지어 시간대 별로 한 일을 기록해놓기도 했기 때문이다. 무계획자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치밀함이었다. 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불렛저널러라 여겼고, 나는 인스타그램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 기차에 올라타 마치 사고처럼 많은 팔로워들을 만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속은 것이다. 사진 몇 장에만 담겨있는 정갈한 다이어리의 모습을 보고 내가 계획적인 불렛저널러라고 여긴 것이다. 사람들이 나의 정체를 알면 모두 떠나가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도 해봤다.


하지만 내가 정말 그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내가 계획적인 사람일 것을 기대해 나를 팔로우한 것일까?


사실 나의 게시물 몇 개만 유심히 보아도 내가 계획 없이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이어리에 할 일은 없고 한 일만 몇 개 띡 적혀있기 때문이다. 물론 할 일을 아예 안 적진 않는다. 병원과 운동은 항상 고정으로 적어둔다. 그걸 제외하고는 데일리 칸은 주로 헐렁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나의 실제 일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헐렁하게 살고,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책을 조금 읽기도 하고 아프면 바로 누워 쉬기도 한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 글을 쓰기도 한다. 이런 일상은 데일리 칸을 채우기엔 아무래도 적합하지 않다. 기호를 그리고 할 일을 나열하고 하나씩 체크하는 것이 불렛저널의 이상적인 모습일 텐데 나는 나열할 할 일이 없다.


대신 나는 한 일을 쓴다. 글 조금 씀. 이라거나 읽은 책 제목을 적는다. 산책을 했다면 산책 시간을 적는다. 그리고 그날의 날씨와 타로카드를 적는다. 하루를 기록하는 방식이 이렇게 단순해진 것이 단지 지금 내 몸이 아프기 때문인지 생각해보았는데 아프기 전 다이어리도 비슷한 모습을 했던 걸 보면 그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아니, 아무것도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실 어떻게 무엇을 기록하는지가 무슨 문제가 있을까. 불렛저널은 그야말로 나 자신만을 위한 저널이다. 세상의 수많은 형식이나 내용을 다 나에 맞게 편집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일 년이 넘도록 전혀 지겨워지지 않고 지속할 수 있었다. 오히려 점점 더 유용해지기만 한다.


불렛저널을 쓰기 전 나는 노트의 산속에 갇혀 살았다. 무엇을 어디에 써야 할지 노트의 용도를 정하는 일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어려웠다.  글쓰기 노트, 아이디어 노트, 글쓰기 아이디어, 문구점 아이디어, 독서노트, 그냥 메모, 다이어리, 진짜 일기장 등 성격이 조금씩 다르지만 아예 같지는 않은 것들을 어떻게 구분해 써야 할지 새 노트를 펼칠 때마다 고민했다. 용도를 정하고 나서 노트를 쓰는데 결국엔 다 섞여 버려서 아이디어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 문제가 되었다. 찾으려는 그 문장이 어디 있는지 몇 개의 노트를 뒤져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 많이 잘못됐음을 느꼈다.


그즈음에 불렛저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나의 삶을 정리해 줄 유일하고 무이한 해결책임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노트의 용도를 나누는 게 어렵다면 하나에 다 때려 넣으면 될 일이었다. 기존 다이어리는 먼슬리, 위클리, 프리노트가 정해진 페이지에 정해진 양만큼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아무 규칙도 없는 나만의 불렛저널에선 내가 모든 걸 창조할 수 있었다.


고민하는 내용이 있으면 바로 그 페이지에 적어내려 갔다. 책의 리뷰는 쓰던 다음 페이지에 적었다. 위클리 페이지에 좋아하는 책의 구절이나 드라마 대사를 적어 넣기도 했다. 읽은 책 목록은 앞쪽에 공간을 만들어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데일리에는 그날그날 읽은 책을 적고, 완독을 하면 앞쪽의 목록으로 돌아와 책 제목과 완독 일자를 적었다. 다른 어떤 노트도 곁들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체계였다. 나는 불렛저널에 풍덩 빠졌고 뭔가를 진득하게 하는 법이 없는 성정치고는 신기하게도 불렛저널을 손에 들고 사계절을 보냈다.


불렛저널로 세 번째 노트를 쓰고 있다.

계획이 없는 자라도 하는 일의 기록은 필요하기에 최근 혼자 추진하고 있는 일의 리스트를 기록하며 또 한 번 불렛저널의 유용함에 감탄하고 있다. 필요한 내용이 있는가? 그리면 된다. 그리고 쓰면 된다. 보기 쉽게 체크하거나 색칠하면 끝. 도트무늬의 노트로 얼마나 다양하고 유용한 리스트를 만들 수 있는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다.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 위시 리스트, 버킷리스트는 평범하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어떤 일, 혹은 물건이나 책을 정리하는 일,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서 도트무늬의 노트에 줄을 휙휙 그어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는 리스트는 유용하고 믿음직한 동료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분명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사는 삶을 기록하는 것은 좋아한다. 대단히 정리된 삶은 아니더라도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것을 기록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리고 다시 어떤 문장을 찾고 싶을 땐 이 노트 한 권만 뒤지면 된다. 지난 일 년은 여러 권의 노트에 널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하고는 싶지만 방법을 모르겠다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배우고 시작해야겠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나도 불렛저널을 접하고 며칠은 구글을 뒤지며 어떤 스프레드를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일단 하면, 그간의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면,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잘할 필요도 없으며 더 나은 결과물을 보여줘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계획적인 사람이 계획적인 사람으로 변해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 내가 기록하고 싶은 것, 그것을 적으면 된다. 나의 생각과 일상을 한 권에 담는 것이다.


불렛저널을 적기 전과 후의 나를 비교하자면 적은 후의 나는 더 선명해졌다. 내가 무슨 일을 했고 한 달간 어떤 컨디션이었으며 매달이 어떤 흐름으로 흘러갔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상태나 생활이 궁금할 때 나는 불렛저널을 다시 훑어보기만 하면 되었다. 한 권에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담는다는 것은 기록하는 도중뿐만 아니라 후에도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되었다.


나는 아픈 상태로 살고 있다. 불렛저널에 남긴 기록을 보며 나는 한 달의 흐름, 분기의 흐름, 반기의 흐름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두 달 동안의 지독했던 악화기가 얼마 전 끝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글 쓰는 것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또한 아주 심플하고 유용한 리스트로 한 달씩 체크하고 있으며 글쓰기 리듬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어 이런 것들이 유용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또 더 많은 다른 것들을 유용하고 간단하고 효율적으로 불렛저널에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계획적일 필요는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우리 모두는 불렛저널을 쓸 수 있다.



https://www.instagram.com/pisces.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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