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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표심 Dec 21. 2022

[사랑] 네가 필요해, 그렇지만 안 필요해

갱년기엔 호르몬을 빨리 먹자

1. 당근마켓 안 할래


  토요일. 일을 끝내고, 5시 넘어 아파트 복도 끝을 향해 갔다. 따라온 키 작은 여자가 거기 사냐고 물었다. 작은 물건을 건네주며, 당근마켓 물품인데 전해주러 왔단다.


  현관문을 열어 아내를 불렀다. 계좌번호에 관해 서로 얘기를 하고선 그 여자는 돌아갔다. 아내가 판 지갑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반품하고 간 거였다.


  나는 거실 전기장판을 뜨끈하게 해 놓고, 허리를 지졌다. 항상 펼쳐져 있는 다용도 밥상에 내가 좋아하는 튼실한 새우가 올라왔다. 나 먹는 것만 보면서, 손에 새우물 묻히기 싫어하는 아내에게 한 개 까서 밥공기에 넣어 주었다.


  두 개째 까서 주려하니, 아내는 됐다고 했다. 그래도 몇 개를 강제로 더 까주었다.


  밥상 앞에서 아내가 말했다.


  "나, 이제 당근마켓 안 할래~"



2. 올 것이 왔다


  엊그제 큰 아들과 제 엄마와의 대화가 떠올렸다. 큰 아들은 당근마켓에 물품을 올릴 때, '반품금지'등 필요한 모든 말을 넣어야 한다고 했었지.


  아내는 말을 이어갔다.

  "아까 그 여자, 반값 택배로 반품한다고 했는데, 말도 없이 집에 찾아왔어. 정말 싫었어~"

  "미안해, 내가 무슨 일인지 몰라서, 그 여자를 집에 들여 버렸네"

  "사람들이 너무 예의가 없어~"

  "그래~ 그러니, 당근마켓에 올릴 때는, 반품금지, 반품 시 1만 원 패널티~ 같은 금지 조항을 문서화했어야 하지 않아?"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올 것이 왔구나. 방어자세를 취했다.


  다시 아내는 입을 열었다.


  "나를 평가하는 말을 또 하는구나.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거잖아~ 언제나 이런 식이야~"



3. 굴레를 끊어야 한다


  순간 판단을 했다. 넙죽 엎드려 빌까? 아니면, 밀어붙여? 결혼 이후 내내, 미안하다, 잘 못했다 등을 남발하면서 살았던 것. 이제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언제까지 져 줄 것인지.


  이 것도 버릇이 된 거야. 순종적이고 다소곳했던 아내가 이젠 나를 이겨먹고 있잖아. 굴레를 끊어야지 안 그래? 속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침묵했다.


  찌르는 허리통증을 참으면서 일어났다. 욕실로 향했다. 더운물에 샤워하면서 적당히 불린 수염을 전기면도기로 깎는 15분 동안의 의례를 하기 위함이었다.


  환풍기를 가동하고 욕실에 들어갔다. 욕실에서 질식해 쓰러져 봤기 때문이다. 샤워기의 따끈한 물이 머리와 온몸 구석을 두드렸다. 전기면도기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습식으로 수염을 깎았다.


  물소리는 밖의 소리를 단절시켰고, 수증기는 온몸을 감쌌다. 순간 그곳은 이 세상이 아니었다. 몸이 편해지면서, 뇌는 말하고 들을 자유를 얻었다. 생각의 공간이 펼쳐졌다. 하늘의 소리가 내려올지.



4. 욕실에서 오라클을 듣는다


  사랑은 뭐지? 처음 인류에게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았지? 좋다고 생각하는 이 것 저 것 쓸어 모아 넣은 '개념 꾸러미'가 사랑이잖아.


  부부사이에 사랑이란 있나?

  아니. 없어. 그럼 뭐가 있지?  

  'I need you' 이런 문구에서 찾아보는 것이 낫겠어.


  부부가 뭐야?


  필요를 채우기 위해 만난 거잖아. 결혼 잘했다는 말도, 남는 장사가 되었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는데... 그러다가 이혼의 문턱에 다다르면, 법륜스님은 그냥 사는 게 이익인지, 헤어지는 게 이익인지 따져보라는 충고도 하던데.


  우리 집 몰티즈 초롱이를 사랑하거나, 애들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해서 일 거야.


  인간은 '사랑할 필요, 사랑받을 필요'를 느끼는 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너를 사랑하고 싶다'

 '너의 사랑을 받고 싶다'

 '너를 필요로 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정리가 되지?


  '네가 필요치 않다'


  음, I need you.

  이 말은 지금 상대를 사랑하고 싶다는 얘기구나. 나도 아내가 필요해.



5. 언제나 당신이 옳잖아


  욕실 불을 껐다. 환풍기는 켜놓았다. 옷을 입고,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아내 옆에 앉았다.


  "아까, 내가 여신을 평가한다고 했는데, 평가한 게 아니라, 당근마켓에 어떻게 글을 쓰라는 '해결책을 제시'한 거였지"

  "그 말이 그거야"


  "말을 꺼냈을 때, 먼저 마음을 읽어 주지 않고, 바로 해결책을 제시해서 마음 상했지? 내가 중간 말을 빼먹은 거야"

  "당신은 언제나 당신 말이 옳잖아~"


  "평소에 나를 비난하는 말들이 잦았어. 쪼잔해, 쫌생이야 등. 그런 비난의 말이 많으면, 부부관계 오래가지 못한다고 내가 일러주었잖아."

  "항상 가르치려고만 들고, 뭐~"


  수십 년 결혼 생활 동안 나는 아내에게 사랑·불륜... 성경·하나님·천국·지옥·구원·설교... 신화·종교·철학·자아·의식... 과학·의학·음악... 등 수많은 개념에 대해 말했다. 잘 들어왔던 아내는 2년 전부터 점차 태도를 바꾸었다. 항상 가르치려고만 든다고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6. 비난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해


  "내 마음이 힘들어. '알아줘' '위로받고 싶어' 이런 걸 말하고 싶어? 그 걸 말해줘. 원함~"

  "당신이 좀스럽게 행동하는 것 보면 같이 살고 싶지 않아. 정말 정 떨어져~"


  비난의 말로 들렸다. 좀스럽다니.


  "그래. 좀스럽다는 등 비난의 말로 나를 규정하지 말고. 내 행동이 감정 상하게 하니, 어떻게 바꿔달라고 원함을 얘기해 주는 게 좋겠어. 비난 말고 내 행동 방향 말이야"

  "내가 고치라고 한 것 평생 안 고치잖아. 말해 무슨 소용이야~ 스스로 몰라?"


  "내가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잖아"

  "애들에게, 나에게, 우리 엄마에게, 당신 아버지에게도 정 떨어지게 말한다고~"


  나는 평소에 감정이 100% 배제된 말을 하기도 했다. 이런 걸 아내는 혐오했다.


  "예를 들어, 나는 허영심 많은 여자, 철없는 여자. 그런 비난 안 하잖아~ "

  "내가 허영심 많고, 철없다는 거야?"



7. 여신이 필요치 않아


  "비난의 언어에 대한 예라고 했잖아"


  물론, 내가 가끔 하고 싶었던 얘기를 슬쩍 예로 들긴 했다. 더 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얘기등을 몇 번씩 들으면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이를 견디기 위해 허영심이란 말을 떠올렸었다.


  우리는 똑같은 얘기를 끈질기게 반복했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 병사처럼 서로 맞서고 있었다.


  지루하니까, 목욕탕에서 받은 신탁(神託, Oracle)을 활용해 '필요'라는 개념으로 대화를 전환했다.


  "나는 아내를 위해 살고 있어. 부부관계는 서로 필요해서 유지하는 거야. 필요하면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낫지?"

  "그래서?"

  "몸과 마음은 함께 하는데, 정 떨어졌다고 접근금지를 명하고 있잖아. 나도 마음을 정리 중이야. 여신이 필요치 않다고."


  "내가 필요 없다고?"

  "나도 살아야 하니. 그렇게 해야 스트레스 안 받고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니까. 어쩔 수 없어"


  "항상 가르치려고만 들고~"

  "내 상태를 전달했어. 이젠 판단해. 앞으로 한 발 다가올 건지, 그냥 그 자리에 있을 건지, 뒤로 더 물러갈 건지."



8. 좀 위로해 주면 안 돼?


  "어쩌라고"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든지. 그냥 평행선을 달리든지. 관계를 악화시키든지. 아내나 남편이나 서로의 태도에 달렸어. 각자 알아서 행동하자고"


  아내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다독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왜? 다독이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어 보고 싶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었으니까. 이제 말을 끝내야 한다.   


  "여기까지 할 말했으니, 일어날게"


  나는 뻐걱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침대에 올랐다. 암막 커튼을 치고 이불을 덮었다.


  잠시 후 아내가 다시 불을 켜고, 침대 끝에 앉았다. 30프로 부드러워진 음색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예전엔, 나를 보고 웃어주고 기쁜 얼굴로 바라봤는데, 이젠 그렇게 안 하잖아"

  "내가 고생 많이 시켰다고, 나를 비난하는 말이 늘기 시작해서 그렇게 됐을 거야"


  "나는 남편을 위로하면서 살았어. 애들도 다독거리며. 그런데, 나는 누가 위로해 줘? 당신이 예전엔 부드럽게 얘기하고, 다독여 줬는데, 이젠 안 그러잖아~"


  "내가 그랬어?"

  "그래 이젠 변했잖아~"



9. 이젠 필요치 않다고


  아내는 마음을 위로해 달라고 투정 부리고 있나 보다. 투정을 받아주는 것이 버릇이 되었나? 이 번에는 그냥 넘어갈 거야. 실험 중이거든. 어디까지 가는지 볼 거야.


  "음,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겠지. 아무튼 나는 여신이 필요치 않다고 마인드 컨트롤하고 있어."


  필요치 않다는 심한 말을 또 뱉었다. 그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완전히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마인드 컨트롤 중이라 했다.


  "엊그제. 아파서 누웠는데, 한 마디도 물어보지 도 않고. 큰 아들은 아프냐고 물었는데"

  "아니 싸워서 아프다고 돌아누운 사람에게 뭘 묻겠어?"


  "아무리 그래도 나는 당신에게 저녁 먹으라고 하잖아. 당신은 왜 안 그래? 비인간적이야"


  침대에서 몇 마디 하는 동안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럴 때면, 다시 얼굴을 고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려고 했다.


  아내는 조금 더 얘기했지만, 더 이상 듣지 않는 척하고, 눈을 감았다.


  인생은 어차피 장기전이다.




ps 이 건 몇 달 전 이야기다.

    내가 아내를

    '그림의 떡' '비구니'라고 불렀던 그때.


    지금 아내는

    다시 여신으로 강림 중에 있다.


    시간 맞춰 먹는

    호르몬 약에게 감사한다.


    약효를 실감하기까지 6개월 걸렸다.



< When I need You - Vanny Vabiola>


 When I need you.

 When I need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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