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될까. 주인에게 안겨줄 상금을 위해 박차 올라서는 깃털을 날리며 쪼고 내리찍는다. 발에는 제 발톱의 몇배는 됨직한 예리한 칼날이 채워져있다. 강렬한 태양아래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인지 칼날만큼이나 번뜩이는 시선들에 눈이 부셔서인지 잠시 어지럼증을 느꼈다. 사봉이라고 했던가. 필리핀에서 닭싸움을 본 적이 있다. 피가 튀고 가끔은 죽어나간다고도 했다. 아마도 수컷이었을 것이다. 암컷보다 덩치가 크다고 했다.
지금은 그 빚을 청산했다는 어느 가수가 운영했던 강남의 이종격투기장을 간 적이 있다. 경기는 그들의 잘 다듬어진 근육만큼이나 팽팽했다. 목숨을 걸고하는 싸움은 아니지만 피가 땀과 뒤섞여 튀었다. 거친 호흡까지 들리는 링 사이드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열광하고 환호하는 그녀들의 눈빛은 필리핀 사람들의 그것과 닮았다. 기시감을 느꼈다.
필리핀의 수탉도 이종격투기 선수들도 아마 살아있는 동안 가장 절정기였을 것이다. 그날 그때 용접불똥처럼 강렬했던 빛을 잊지 못한다. 빠알간 꽃 이파리처럼 흩뿌려지던 핏방울을....
내가 아는 두 마리의 수탉이 있다. 1933년 발표된 이효석의 단편소설 '수탉' 그리고 내게는 풋풋한 최유라를 볼 수 있어 좋았던 1990년의 영화 '수탉'이다. 찌질한 청춘 을손과 거세된 중년 두칠은 60년 시차에도 잘 버무려져 30년이 흐른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을손은 번번히 이웃집 닭에게 당해 깃털이 빠진 채 돌아오는 수탉신세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능금서리해서 무기정학이나 당하고 희망도 야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무력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딸을 줄 집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자신을 빼닮은 수탉에게 부아가 날 뿐이다. 작고한 김인문의 캐스팅은 절묘했다. 그가 연기한 두칠은 장모와 억센 아내, 딸 셋. 여자 다섯에 둘러쌓여 기를 못피고 살아가는 닭똥 냄새에 절인 양계장 주인이다. '젖은 낙엽'신세 마저도 허용될 것 같지 않은 그 역시 무정란도 생산하지 못하는 양계장의 쓸모없는 수탉이나 마찬가지다. 2020년을 사는 나는 여전히 을손과 두칠을 만나고 있다. 또다시 기시감을 느낀다.
닭을 사육할 때 적절한 암수 비율은 10:1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래야 수컷끼리 암컷을 차지하려는 치열한 경쟁도 덜하고 유정란 생산 효율도 높아진다. 암컷도 수컷에 덜 시달린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수탉으로서는 젊고 건강한 한때의 호사다. 늙고 약해지면 유심히 살피던 주인에게 언제 모가지를 비틀릴 지 모른다. 생산성을 위해 일부러라도 주기적으로 새로운 젊은 수컷으로 교체해줘야 한다고 했다.
드물게보는 네델란드 영화로 <안토니아스 라인 (1995)>이 있다. 영화제목 그대로다. 안토니아(여주인공)의 라인(직계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아직 한국사회와는 거리가 있는 '가모장제' 가족의 이야기다. 젠더, 성소수자, 페미니즘, 가족의 의미, 생활공동체 등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경쾌하게 풀어냈지만 던지는 메시지나 울림은 크다. 레즈비언인 주인공의 딸은 아이만을 원해서 남자와 섹스를 한다. 그녀가 섹스 후 임신 목적에 충실하려고 물구나무를 서서 골반을 흔드는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왠지 그로테스크하다.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윈난성의 마시족 여인을 떠올렸다. 남성과 결혼하지않는 주혼 풍습의 모계사회다. 출산과 양육, 생계와 성 주도권도 여자에게 있다. 생물학적 아버지만 필요하다. 부족을 떠나 북경에 사는 마시족 여인이 출연했다. 결혼적령기의 그녀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지 결혼을 해야할지 고민한다고 했다.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보여지는 새로운 가족 형태, 생활 공동체의 모습이 우리가 지향해야할 이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21세기에 모계중심의 가모장제 사회가 존재하는 것처럼 <안... 라인>의 세계로 이동하는 움직임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머리는 21세기에 들이밀고 몸통은 아직 20세기에서 거둬들이지 못한 공룡인 나는 왠지 이 상황이 낯설고 두렵기만 하다. 중학생이던 아들에게 신부가 되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었다. '여자를 좋아해서 안되겠다'는 답을 듣고서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는 그 웃음에. '이성애자'여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졌고 한번 더 권유하지않은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주제넘는 걱정이 고개를 내민다. 미래의 어느날. 예상하지 못한 날에 독신을 고수하던 딸아이가 "아빠 우리 '정자' 고르러 가요. 아빠도 아기 좋아하잖아. 손주 안겨줄게"라며 팔짱을 끼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스럽다. 백화점 쇼핑하듯 동반을 해야할까 아니면 앉혀놓고 만류를 하게 될까.
자꾸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들이 많아진다. 탈피를 거듭해도 번데기인채 웅크린 내 모습을 볼 때도 있다. 어쩔 수 없는 건 아무리 기를 써도 안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상이변으로 녹는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유빙처럼 세상의 외곽으로 밀려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