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도착했다. 어젯밤 인터넷으로 주문했는데 오늘 오후 도착한 '돈키호테 1,2 '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라만차의 기사 얘기건만 S가 읽어 준 대목은 내 기억에 없었다. 얼마전 K가 강의 자료로 책 한권을 샀는데 알고보니 이전에 줄을 치며 다 읽었던 책이었던데다가 책상 바로 앞 서가에 꽂혀있더란 얘기를 하며 웃었던 일이 생각났다.
아주 오래전 돈키호테를 읽었었다. 나 역시 읽었으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1권이 900페이지에 달하는 성경책 두께만한 이 책은 아니었다. 번역자도 훌륭한데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이라 했다. 세르반테스의 기구한 인생역정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인터넷으로 바로 주문했다.
산초가 인구 1천명의 영지를 통치하게 됐다. S가 읽어준 대목은 산초가 판관으로서 내린 세가지 사건에 대한 판결이 그 내용이었다. 첫번째는 고깔모자에 얽힌 재단사와 농부의 사건, 두번째는 채무자와 채권자가 된 두 노인의 다툼을 지혜와 혜안으로 해결한다. 세번째 사건은 23년간 지켜온 정조를 무참히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여자와 여자의 계략에 빠져 댓가를 지불했음에도 재판정까지 끌려나왔다고 억울해하는 돼지장수의 일화다. 산초는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 돼지장수가 가진 모든 돈을 제소한 여자에게 주라고 명령했다. 여자가 지나칠 정도로 감읍해하며 재판정을 떠나자 눈물을 펑펑 쏟고 있던 가축상에게 말한다. "이보시오, 저 여자 뒤를 를 쭟아가서 억지로 그 지갑을 빼앗아보시오. 물론 주지 않으려고 할테지만, 그렇게 해보고 그 여자와 함께 여기로 돌아오시오."
이윽고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매달리다시피 한 채 돌아왔다. 물론 여자가 사력을 다해 지켰으니 지갑을 빼앗는 건 불가능했다. 여자가 소리쳤다. "나리....이 포악무도한 자가 백주대낮에 겁없이 내 지갑을 빼앗으려 합니다요." 통치자가 물었다. "그래서 빼앗겼는가?" 여자가 대답했다. "어떻게 빼앗겨요? 지갑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목숨을 빼앗길 겁니다요. 내가 누군데!..." 가축상이 말한다. "이 여자 말이 맞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제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합니다. 전 관두겠습니다." 그러자 통치자가 그 여자에게서 지갑을 받아 가축상에게 돌려주며 성희롱당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힘이 센 여자에게 말했다. "자매여, 그대가 이 지갑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보여 준 그 기세와 용기를 그 절반만이라도 그대 몸을 지키기 위해 보여줬더라면, 헤라클레스의 힘도 그대를 제압하지는 못했을 것이오. 잘 가시오. 무진장 벌받을 게요. 앞으로 그대는 이 섬은 물론이고, 주변 6레과 안에 머물러서는 안되오. 그러지 않을 시 채찍으로 2백 대를 때릴테니 그리 아시오. 다시 말하니 당장 나가시오, 이 협잡꾼에 철면피에 사기꾼 같으니라고!" 여자가 나간 뒤 통치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편안히 돌아가시오. 그리고 .... 앞으로는 아무하고나 잘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시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통치자의 판단력과 펀결에 감탄했다. <돈키호테 2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발주자와 수급자간의 계약, 선의에서 비롯된 채권관계, 그리고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고, 확언할 수 없는 남녀간의 송사 문제를 누구인들 한치 어김없이 해결할 수 있을까. 다만 얽히고 설켜 그 끝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린 현대 사회가 과거 가난하고 단순했던 시대의 삶보다 더 낫다고도 할 수 없거니와 온갖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증오와 편견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은 정교해진 정치체제와 법체계,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더 어두워진 눈, 간교해진 머리 그리고 차가워진 가슴으로 인해 정말 알고자하는 진실과는 더 멀어져가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