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 딸아이는 아르바이트를 가고, 아내와 아들은 조카부부와의 약속이 있다. 조카부부는 녀석이 들어 갈 대학의 직속 선배들이다. 어릴 때부터 가까이 지낸 사촌형의 영향으로 들어간 학교인데다 형수까지 과선배이니 일종의 '사전 오리엔테이션'자리다.
"당신은 카페로 갈거야?" 주말 별일이 없으면 나는 아파트 건너편 카페를 찾는다. 대개는 아내와 함께다.
"아니. 영화보러 갈거야"
"영화? 혼자서...." 흐릿한 말꼬리에 묻은 말을 짐작하겠다. '영화볼거면 같이 가지' 뭐 그런거다
"당신이 안좋아할 수도 있는 영화 일거 같아서 그래"
"응"
귤 몇 알을 챙겨 나섰다.
싱그러운 미소가 아직 소녀인 아내와 그녀를 최고의 여자친구라고 말하는 천상 건축가인 남편의 이야기. 영화 <인생 후루츠>다.
어제 저녁 추천한 지인이 들려 준 간략한 스토리에서 최근 '건축과 디자인'을 다시 생각해보던 나는 같은 길을 먼저 간 대선배를 만날 수 있을거라는기대를 했다. 아들과 내가 선배를 찾아 나선 주말이다.
상영관이 별로 없는데다 주말인데도 오전, 저녁 두 번 상영이다. 팝콘과 콜라를 사기위해 줄을 섰다. 이번 참에 매번 떴다 사라지는 통신사 마일리지 할인도 써볼 참이다.
"팝콘 큰거와 콜라 하나 주세요. K*통신사 할인 되죠?"
"더블 콤보부터 해당 되는데요"
"더블 콤보면...?"
"팝콘 라지사이즈하고 콜라 두 잔입니다"
"아 네... 그냥 계산해주세요"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 법이다. 아내의 부재를 이런 데서도 느끼다니...
영화라기 보다는 다큐멘터리다. 굳이 비교하자면 일본판 '워낭 소리'라고 할 수있겠다. 그런데 울림과 미학이 다르다. 미사 전례중 복사가 치는 -두터운 사발처럼 생긴데다 치는 것도 절구모양인- 종 소리처럼 조용하지만 낮고 길게 여운을 남긴다.
정원에서 캐어 온 죽순을 '아이'라고 부르는, 작약꽃 팻말에 쓰인 "미인이 되려나?"라는 글귀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느껴진다.
노건축가는 아흔 나이에 행복한 작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 되려 고맙다며 사례를 마다하고 의뢰인에게 돈보다 사람이라는 편지를 쓴다. 힘주어 쥔 연필 뒷꽁무니에는 지우개 대신 살색 -요즘은 쓰지않는 명칭이지만- 색연필이 매달려 있다. 은퇴를 하고서도 스케치북과 도구를 챙겨놓는 그는 프로다. 그림 속 두 사람은 언제나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남편이 떠난 후 깨어진 수반을 불길해 하는 딸에게 "좋은 일만 생각하고 나쁜 일은 입에 담지 말라"고 이른다.
에세이인줄 알았는데 시를 읽고, 건축을 듣고 싶었는데 인생을 배운다. 부모 수업은 덤이다.
오늘도 그녀는 감자 고로케를 만든다. 요리부터 정원 가꾸는 일까지 못하는 게 없는 그녀다. 영정이 올려진 소담한 상에 올린다. 생전 그는 감자를 좋아했고 정작 그녀는 감자를 못먹는다. 외동딸로 태어나 남편 뜻을 쫒으라 배웠는데 시집 와 마음껏 말할 수 있어서, 언제나 좋은 생각이라고 그리 하라고 말하는 그가 있어 행복했던 65년. 같이 한 날이 혼자였던 날보다 많았다.
카메라는 상위에 놓인 주인 없는 나무숟가락에 머문다. 남편은 나무수저만 썼다. 이제는 그녀를 위해 노란 팻말을 만들어 줄 사람이 없다. 아니 창고 어디 쯤엔 아내를 위해 미리 만들어 둔 노란 펫말이 쌓여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