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연착했다. 애비는 괜히 와도 좋다고 한 건 아닌지 슬그러미 불안해진다. 20시 30분이면 도착예정인데 21시에 arrived 전광판이 켜졌다.
저녁을 같이 하려던 식당은 문을 닫을 시각이다. 서둘러 검색을 한다. 이 시간에는 해장국집이 유일한 대안일 것 같다. 22시까지 운영한다고 나와 있다. 다행히 공항과도 가깝다. 간판 불은 켜져있고 식사 중인 손님도 눈에 띈다. 그런데 거부당했다. 2단계라 21시40분까지밖에 운영하지 않아 받을 수 없단다.
제주 시내에서 부녀는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그냥 편의점에서 뭘 좀 사가서 먹을까?"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못먹었는데..."
애비는 딸이 안쓰럽다. '항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말어? 전액 보상받아봐야 7,300원인데 인지값이 더 들겠지'
"그럼 일단 숙소로 가면서 살펴보자" 유턴을 하는데 흑돼지집이 보인다. "혹시 모르니까 가서 식사 되는 지 물어 봐" 이내 폰이 울린다.
"아빠 된대. 여긴 11시 까지래"
'불을 피워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접근을 못한다는 건가? 어째 들쑥날쑥인데...' 살짝 고개를 들던 의구심을 새끼를 먹일 수 있다는 안도감이 거침없이 눌러 버린다.
1인분에 40,000원(400g). 흑돼지가 아니라 금돼지다. 쫀쫀한 애비는 1인분의 고기와 김치찌게(7,000원)를시킨다. 공기밥은 별도다. 그렇게 자동차 렌트비 하루치와 비행기 삯을 합친 것보다 훨씬 비싼 끼니를 때운다. 애비의 3일치 식량이다. 누가 큰 딸을 살림 밑천이라 했나 애물단지인것을...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산중의 습한 공기 때문에 몸이 찜찜하다고 에어컨부터 켠다. 그동안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는 애비는 창을 여는 편을 택했다.
시작부터 삐그덕거린다. 식당에서 숙소로 출발할 때 딸의 도착을 확인하는 아내와의 스피커 통화가 떠오른다. "부녀간 둘 만의 첫여행인데 또 둘이 토닥거리지 말고 토닥거리더라도 거기서 풀고 와. 알았지?"
그런데 둘은 돌아오는 내내 "딸이 와서 반갑지 않느냐." "아니다 온다해서 할수없이 허락했을 뿐이다." "그러려면 왜 낳았느냐." "너 같은 딸이 나올 줄 몰랐다." "그래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느냐." "이제껏 책임졌잖느냐." "엄마와 딸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너는 안중에 없다." "거짓말 하지마라." 맥락도 없고 의미도 없는 대화로 내내 토닥거리며 왔던 터였다.
20대 딸이 애비 앞에서 거침없이 겉옷을 벗고 브라와 팬티바람으로 샤워실로 향한다. 그 모습에 애비는 웬지 기분이 좋다. 내 새끼. 아직 애기애기한 내 강아지다. 말로는 빨리 부모 곁을 떠나라고 하지만 속내는 정작 애비 조차 모른다. 어떤 일은 닥쳐봐야 알게 되는 법이다.
딸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하루 더 묵게 됐다. "아빠 언제까지 거기 있을거야?" "글쎄 모르지 수요일까지 있을 수도 있고..." 말꼬리를 흘렸을 뿐인데 딸은 아예 수요일 김포행까지 왕복을 끊어서 내려왔다. 대책없는 것까지 빼다 박았다.
애비는 숙박을 하루 더 연장했다. 귀경 항공편도 같은 시간으로 예매했다. 렌트는 연장이 안돼서 반납하고 다른 회사 차량으로 갈아타야 한다. 어릴 적 발군의 어른 공대와 존댓말로 칭찬이 자자하던 딸은 머리가 크고 난 후 아빠에게 반말을 한다. 그러지말라 시켜도 일부러 안듣는다. 괜히 멀어지는 느낌이 싫다고 고집을 부린다. 애비는 이제 반쯤 포기했다.
내일 새벽에는 제주시까지 가서 차를 바꿔와야 한다. 남은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니 새벽 4시다. 6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반납은 8시다. "자자. 넌 뭐하니?" "내일 일정 짜" 내일 하루는 영락없이 기사노릇을 해야 할 판이다.
5시 50분 애비는 딸이 깰까봐 알람소리가 나자마자 끈다. 조용히 샤워를 하고 양말을 신는데 딸은 잠꼬대인지 신음인지 모를 말을 뱉는다. "음...아빠. 갔다 올거지. 다녀오세요~음냐"
"그래" 애비는 렌트사를 찾아가며 연료계기판에 눈을 떼지 못한다. 80%정도이니 도착하면 원래의 75%와 딱 떨어질 것 같다. '음. 어제 마지막 주유했던 만원 어치가 주효했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차를 갈아타고 돌아오니 9시다. 딸은 어쩐 일로 샤워까지 마치고 애비를 기다린다. 혼자일 땐 오메기 떡과 컵라면으로 때우던 애비는 딸을 위해 간 떨리는 리조트의 아침 조식 부페를 쏜다.
1인당 18,000원 또다시 두 사람의 왕복 항공기 삯이 뱃속으로 들어간다. 다행히 부페는 알차고 맛있다. 기분이 누그러진다.
애비는 넓은 창을 등진 젖은 머리의 딸이 이슬을 머금은 수국보다 더 어여쁘다. 이제 어엿한 아가씨다.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애비의 앞접시에 말없이 구워진 흑돼지 한점씩을 올려주고 음식 담긴 부페 접시만 들고 테이블로 돌아 온 애비의 수저부터 챙기는 딸이다.
딸은 자주 말한다. "아빠는 츤드레야. 난 알아 아빠가 얼마나 날 사랑하는지" "헐 누가 그래." "내 맘이거든"
'어째 그런 것까지 닮았냐.'
그렇게 애비의 알쓰신잡 (알뜰하게 쓰면 신명나게 잡다한 걸 할수 있다)여행은 딸의 난입으로 어그러졌지만 자식은 당신이 부모에게 준 가장 고귀한 선물이고 영혼의 끼니인 걸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