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고객이 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오늘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모든 서비스 직들에게

by Project Keepgoing

이십 대 중반쯤, 증권사에서 PB로 사회 초년생 시절을 시작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물론, 금융 지식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객을 응대할 때마다 나의 부족함이 드러날까 봐 늘 두려운 마음을 안고 일했습니다.


특히 그 당시 나를 극한의 공포로 몰고 갔던 한 고객이 있었습니다. 그 고객은 오전 9시가 되자마자 제 내선 번호로 전화를 걸어 주문을 넣곤 했습니다.


그 고객은 제가 전화를 받으면 한마디 소개도 없이 종목 코드를 6자리 부르고 얼마에 얼마 매수라고만 명령하듯 읊조렸습니다. 계좌번호도, 비밀번호도 부르지 않았습니다. 마치 내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한 태도였습니다.


그 태도 자체가 당시의 나에게는 큰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신입이었던 저는 주문 하나하나를 처리하는 과정이 모두 두려웠습니다.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던 저는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을까 손이 떨렸고, 버튼 하나를 누르는 데에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코드를 누르고 있다 보면 아직도 매수 체결 안되었냐고 미친 듯이 윽박지르며 쌍욕을 내지르곤 했습니다. 가까스로 주문이 체결되면 몇 번의 욕설을 더 듣고서야 전화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전 9시만 되면 가슴이 조여 왔습니다. 장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 전화벨이 울릴까 봐 긴장했고, 전화가 오지 않아도 이미 울린 것처럼 심장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긴장 속에서 주문을 처리하고 나면, 그날 하루는 이미 반쯤 소진된 기분이었습니다. 쉬는 날에도 9시만 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고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이 나와 맞지 않는 건 아닐까.’ 사회생활도 잘 모르겠고, 긴장과 공포 속에서 시작되는 하루가 점점 버거워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시절의 공포를 안은 채, 결국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사회생활을 모르는 20대라서, 실력이나 경험이 없어서 그런 공포에 시달리는 줄 알았습니다. 제 분야에서 경력이 쌓이면 이렇게 공포에 시달릴 일은 없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약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 아주 비슷한 공포심이 다시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새로 들어간 직장에서의 내 모습도 십여 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내 어깨에는 기대 수준이 높고 까다로운 상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잘하는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친절하지만, 자기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나는 그분의 마음에 들어 ‘인정’을 받았지만,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족한 실력 때문에 갈굼과 핍박을 당하는 동료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느끼는 감정도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매주 월요일, 단 한 주를 여는 미팅 시간이 되면 자리에 앉지 않는 팀원들을 불러 모으고, 자기 성에 차지 않는 팀원들을 혼내고 탐문하기 위한 순간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그 타깃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까지 공포심이 밀려들었습니다.


‘나도 잘못하면 혼나지 않을까.’
‘다음은 내 차례 아닐까.’



그분이 나를 보고 웃어주고, 말을 걸어주는 얼굴 앞에서도 나는 속으로 긴장했고, 웃음 속에서조차 마음은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일하기 시작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저는 공포심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니체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공포심의 정체라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이라고요.


그렇다면 나는 왜 두려워졌던 걸까요.

무엇이 공포처럼 느껴졌던 걸까요.

혼날까 봐였을까요?

욕을 먹을까 봐? 또 윽박지르는 걸 겪을까 봐였을까요.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흔들 수 있을 것 같아서였을까요.


물론 제가 겪은 상황들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옳지 않은 행동들입니다. 무지막하게 화를 내고 욕을 쏟아붓는 고객이나, 팀원의 감정이나 실수를 이유로 공공연한 곳에서 대놓고 질책을 하며 기강을 잡으려는 상사나...

제 잘못이라기 보단 그들이 비정상적인 게 맞았습니다.


그렇다고 이 상황자체는 제가 바꾸기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윽박지르며 욕하지 말라고 전화를 끊어버릴 수도 없었고, 일말의 리더십이나 배려 따윈 없는 그 매니저를 자르라고 고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내 사업을 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100명의 고객이 오면 그중 100명 모두 친절하고 상식 선에서 행동하는 고객일 수는 없습니다. 혹여 오늘을 잘 넘겼더라도 언젠가는 진상과 비정상의 사람들과 마주할 수밖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핵심은 그런 상황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미리 두려워하기로 한 것은 내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안 좋은 일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여기가 아니라면 다른 곳에서도 분명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 공포심이 만약 '곧 그 진상이 나타날 거야'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데서 나타난다면, 그것만큼은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몰라 오늘은 그냥 깨지는 날' '세상엔 미친놈도 많지'라고 생각해 버리고 그냥 이상한 손님은 맨날 오는 것이라고 상황 자체를 인식해 버리면 됩니다.

마치 365일 중 비가 하루도 안 오는 날이 없는 것처럼 비가 오면 그냥 비가 오는 것이고, 내가 아픈 날은 상태가 안 좋은 날일 뿐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되뇌어 보면 됩니다.

이상한 점은, 그렇게 하면 조금은 가라앉는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내가 커지지 않게 막아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미리 앞서서 그 순간을 카운팅 하며 두려워까지 하는 건 참 가혹한 것이니까요..


만약 그 두려움이 그 사람이 나를 위협하는 상황 자체에서 온다면, 그 인간은 왜 그럴까를 분석해 보면 좋습니다.


주식 주문이 제때 들어갔는지 안절부절하며, 굳이 화낼 필요도 없는 사람에게 아침부터 욕을 내뱉는 인간의 삶은 얼마나 고달픈 것일까. 어떻길래 그는 저리 삐딱하고 가엾게 사는가. 어쩌면 스스로 주식 주문조차 넣지 못해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만 하는 본인의 '나약함'을 그런 공격성으로 덮는 것 아닐까.


나의 상사였던 사람도 제대로 된 리더십이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하려면 끊임없이 채찍질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족한 인간이구나. 또는 그런 본인의 부족함을 팀원들에게 풀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도 나쁜 상사로 낙인찍히는 것은 싫어서 뒤에서 눈치 보고 스스로 괴로워하는 건 아닐까.. 그걸 그냥 가엾게 여겨버리면 됩니다.



세상에는 감정이, 기분이 태도가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못났음을 알고 있음에도 고칠 수 없거나 심지어는 알고 있지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그런 존재들, 그런 상황들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냥 으레 발생하는 것들로 받아들이며 긍휼히 보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그저 상황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이건 내 몫이 아니다’라는 기준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고 말이죠.


나를 괴롭히는 공포와 두려움은 사실상 ‘내가 상처받았다’가 아니라, ‘내 생각이 커졌다’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포심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대로.’

‘내 상상으로.’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나를 괴롭히는 공포와 두려움은 사실은, ‘내가 생각한 대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PROJECT KEEPGOING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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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감상평과 의견도 감사히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