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 같은 병
일 년 넘게 다니는 정신과에서 받은 나의 진단명은 두 개가 있다.
우울증 (F329- 한국 질병 분류기호)과 과다활동성 주의력결핍장애 (F900)이다.
두 번째는 아마 어디선가 들어봤을 ADHD, 즉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이다.
"산만함, 과잉행동, 충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질환"인데 보통 12세 전에 발병한다고 한다.
성인 ADHD는 어렸을 때 발현한 ADHD의 잔재인지, 아니면 별개의 시기에 발현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소아 ADHD 환자 2명 중 1명은 성인이 돼도 증세를 유지한다고 한다. 더 자세한 설명은 이 링크 클릭.
내가 어렸을 때부터 ADHD를 가지고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니, 사실 있었던 것 같은데 공식적으로 진단을 받은 적은 없다.
일부 ADHD "환자"는 (병원 웹사이트에서 "환자"라고 표기해서 이렇게 써봤다. 내가 환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충동성과 심한 감정 기복을 보이고 주의 집중력에서 *지속적인 결함을 보인다고 한다.
(출처: 아산병원 웹사이트)
여느 아이처럼 나는 청소년기에 감정 기복을 보였고 공부할 때는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나는 과도하게 충동적이었고 감정 기복이 매우 심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똑같았고, 특히 나의 충동성은 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켰는데- 예를 들자면, 어느 날 갑자기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강한' 생각이 들어 짐을 훌쩍 싸고 홍콩으로 떠났다. 나는 백수였고 홍콩에서 뭐를 해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당연히 일 년 가까이 필요 없는 고생을 자주 했다.
정신과에 가기 전에는 그저 내가 깡기가 있어서, 젊어서 했다고 한 선택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ADHD 때문에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든다. 이렇게 파고드니 나의 대한 자각까지 흔들어놓아서 내가 했던 아슬아슬한, 하지만 꽤 '용감'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선택들이 다시 보였고, 정신과 약 없이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까지 도달했다.
왜냐면 정신과 약을 먹으면 나는 좀 더 차분한 상태로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아슬아슬한, 하지만 꽤 '용감'했다고 생각했던 선택들이 다시 보였고,
정신과 약 없이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까지 도달했다.
2020년 12월,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여행과 오버타임으로 쌓인 휴가를 모으니 삼주 가까이 쉬게 되었다. 약이 떨어졌는데 왠지 병원에 가기가 싫었다. 그래서 내가 약 없이 진정 어떤 사람 (?) 일지 알아보려고 내 맘대로 약을 끊었다 (이것도 딱히 계산적인 선택은 아닌 것 같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매일 밤 새벽,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치킨과 피자를 시켜먹었고 14시간씩 잠만 잤다 (무기력함은 우울증 증상 중 하나이다). 식욕을 조절할 수 없었고 감정의 소용돌이가 무서워서 뉴스조차 멀리했다.
약 없는 삼주를 버티고 나는 회사 복귀가 다가오자 정신과를 다시 찾았다. 약을 계속 안 먹는다면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았다.
약을 계속 안 먹는다면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나는 심하게 집중을 못하고 정리에 어려움이 있는데 위에 써진 ADHD 증상처럼 우선순위를 정하거나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데 매우 어려움이 있다.
어느 정도로 심하냐면- 나는 자주 중요한 시험을 놓쳤고 심지어 딴 시험장에 가기도 했다 (HSK 급수가 이래서 없다ㅎㅎ). 비행기도 몇 번 놓쳤다. 심지어 대학 입학 인터뷰 날짜를 잘못 알아서 놓칠 뻔했고 대학 입학 서류도 미루다가 마감 몇 시간 전에 엄마가 상기시켜줘서 겨우 냈다.
한마디로 '엉망진창'인 학창 시절을 보냈고 겨우겨우 그리고 아슬아슬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심정으로 매일을 살아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해 빠진" 나의 정신 상태 때문에 한 실수들이라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책을 했고, 심한 자책이 다시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절망적인 사이클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계속됐다.
피디였을 때는 제시간에 마감을 못해 내가 맡은 프로그램이 결방되는 악몽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아무리 다짐을 하고 계획을 짜도 나는 데드라인 안에 마감하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려웠다.
기자로 일하는 지금, ADHD의 돌기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느껴진다.
항상 내가 정해놓은 마감시간은 지키기가 어렵고 미리미리 계획해야 하는 인터뷰들을 플래너에 적다 보면 머릿속은 꼬이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인터뷰를 놓칠까 봐 나는 알람을 항상 2-3개씩 해놓기 때문에 현재까지 큰 사고는 없었지만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머릿속은 항상 종이비행기가 여러 개 날아다니는 것 같고 그래서 인터뷰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작년에는 1/2만 써놓고 끝내지 못한 기사 세네 개를 만지작거리며 후회했다. 영화도 한 시간이 지나면 엉덩이가 들썩여서 영화관을 나와버리는 내게 500자의 기사는 거의 히말라야 같다.
기사 하나를 쓰려면 - 쉽게 산만해지는 내게 몇십 개씩 열어둔 탭이나 다른 것에 눈길을 주지 말라고 설득해야 하며, 조그만 비판에도 과민 반응하고 좌절하는 나를 다독여야 한다. 대인관계가 어려운 내게 전화를 들라고 재촉해야 하고, 기사가 나오고 나서도 혹시 실수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나 자신을 반복해서 믿어야 한다.
일단 내 주위에 ADHD를 겪고 있는 성인은 알지 못한다. 아마 예전의 나같이, 본인 성격이라고 생각하고 진단을 못 받은 케이스가 많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ADHD를 미국 청소년 드라마에서 살짝 어색하면서 엉뚱한 행동으로 웃음을 주는 캐릭터로 접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ADHD 환자의 현실은 우스꽝스럽기 보다는 고단하다.
진단을 받고 약을 먹으면 나아지는 나의 모습을 보니 왜 더 빨리 정신과에 가지 않았는지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일정 부분은 "보험에 지장"이 된다고 정신과 방문을 taboo시 한 엄마의 잘못도 있다. 성격으로 여기고 나이를 먹으면서 세월이 자연스럽게 해결해주기를 기다렸던 나의 무지도 있다.
언제쯤 나는 '완치'가 될까? 몸의 병과 다르게 투명한 마음과 머리의 병은 아무리 손을 휘저어 봐도 잡히지가 않는다. 미끌미끌한 지렁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