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작가 로베르트 무질은 그의 소설 ‘특성없는 남자1’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왜 인간은 파장을 이용해 빨간색을 백만 분의 1밀리미터까지 정확히 묘사할 수 있으면서도 붉은 코에 대해선 그냥 붉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코가 어떤 붉은색인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인가?』
그저 붉다고 표현하는 건 너무 분방한 상상을 만들어낸다. 물론 상상은 자유라고들 하지만, 너무 큰 자유는 오히려 구리다. 적어도 나는 그렇던데. 입 모양도 제대로 맞지 않는 더빙판 영화를 보는 거 같달까. 내 식대로 더빙을 한다면, 아니다 더빙한 영화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내 식대로 표현을 하자면 이렇게 할 거다.
『술에 취한 내 앞 여자의 코가 붉다. 신기하게도 동글동글한 콧방울만 붉어져 있다. 귀여워라. 어떻게 붉냐면 피부가 까만 탓에 덜 익은 체리와 같은 검붉은 빛을 띤다. 진토닉을 즐기고 있는 내게는 옅은 레몬 향이 조금 날 뿐이지만, 그녀는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켜고 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비릿한 알콜향이 난다. 분명 저 덜 익은 체리에서 나는 향일 테다. 안주로 먹던 과일 중 체리를 골라 위스키에 담가버리면 저런 모양새일까. 원래 체리는 차갑게 먹어야 맛있지만, 저 코를 깨물면 덜 식은 잼을 입에 넣은듯한 온도가 내 이빨에 닿을 것만 같다. 어차피 익지도 않은 체리라 내 얼굴에 온 주름이란 주름을 만들어 낼 게 뻔하다. 그래도 혹시 모르지 달짝지근할 수도. 그러고 보니 뜨끈한 체리를 입에 넣어 본 적이 있던가? 그래서 참지 못하고 물어버렸고, 그녀에게서 비명을 끄집어내고야 말았다.』
우리는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주로 시각적 경험을 위주로 이야기를 한다. 나는 후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까지 표현하고 싶다. 그러면 되지 않느냐고? 당연히 그러려고 한다. 그런데 다양한 감각을 그리는 투박하면서도 명료한 단어들과 표현들을 나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한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탓에 내 글이 너무나 구리고 투박하고 못나 보이는 때가 너무 많다. 사실 글쓰기의 문제라기보다는 감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 핑계를 대고 싶다. 우리는 기분 좋다 행복하다 우울하다 등 다양한 감정을 그저 좋다 행복하다 우울하다고 말해버리고 그게 끝이다. 기분이 몽글해지는 것 같아 좋아, 비가 그치고 쏟아지는 햇살을 느끼는 것 같은 행복이야, 온종일 아무도 찾지를 않아 외롭게 침대에 누워있는 것 같이 우울하다고 말하는 이는 드물다. 감각을 제대로 감각할 줄 모르고, 표현할 줄도 모른다. 이러니 당연히 더는 궁금해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에 대고 소리치고 싶다. 섬세하게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표현해야 한다고.
누구도 제대로 표현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단 말야. 그래서 너무나 아쉬워. 달나라에 발을 얹고, 우주의 신비는 알아내려 부단히 노력하면서 왜 우리가 살아있음을 의미하는 감각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노력하지 않는 건지. 정부는 이런 걸 장려해야 해. 언젠가 똑똑한 이들이 머릿속에 무언가를 넣는 기술을 개발해낸다면 투박하면서도 명료한 단어들과 표현들이 담긴 사전을 제일 먼저 머릿속에 통째로 넣어버릴 테다. 그리고 내 친구들이 귀를 막아버릴 때까지 느끼는 것들을 표현할 거야.